10월 27일 아침. 선박 위에서 일출을 맞이했다. 그런데 현대 커리지호(이하 커리지호) 갑판 너머에는 여전히 제주도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다음 기항지인 중국 상하이 항만국측에서 많은 상선들이 몰려 체선이 우려된다며 저속 항해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커리지호는 저속항해에 어울리지 않았다. 현대상선에 따르면, 이 선박은 전 세계 상선 가운데 가장 큰 엔진을 장착하고 있다.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 날 오후 커리지호 기관실로 내려갔다.
일행을 맞이한 박치병 1등기관사는 “커리지호는 상선 속도경쟁의 마지막 산물”이라며 “1만 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 선박에도 12기통 이상의 엔진은 없다”고 설명했다.
커리지호는 지난 2007년 10월 현대중공업이 건조해 현대상선에 인도한 컨테이너선으로 최대 속도 30노트 이상을 낼 수 있다. 현대상선에 따르면 이는 현존하는 상선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다.
기관실에 들어서자 귀마개를 뚫고 엄청난 기계음이 고막을 때렸다. 에어컨 설비가 마련된 기관 통제실과 달리 뜨거운 열기가 엄습해왔다. 박 1등기관사는 “42일간의 항해 동안 기관부원들만 2ℓ 생수 600병을 마신다”라며 “기관실은 더위와의 싸움”이라고 토로했다.
그를 따라 기관실 상층부에서 계단을 4~5번 내려가니 엔진 하부에 닿을 수 있었다. 거대한 14기통 엔지을 마주하니 “속도경쟁의 마지막 산물”이라는 박 1등기관사의 말이 실감났다.
안타깝게도 커리지호의 14기통 엔진은 최대 출력을 잊은지 오래다. 속도 26노트를 기준으로 하루 280t을 소비하는 커리지호는 글로벌 해운업 불황으로 유지비용 절감을 위해 최근에는 15노트 안팎으로만 운행되고 있다. 이 경우 하루 연료 소비량은 90t 수준으로 대폭 줄어든다.
3개 층 규모의 기관실은 커리지호의 생명선과 같다. 기관실 중앙으로 14기통 엔진이 자리 잡고 주변부로 증류기, 자가 발전기 등이 여러 설비들이 들어서 있었다.
박 1등 기관사는 “총 4대의 발전기가 순환해 1대당 3300kWh의 전력을 생산한다”라며 “선박에서 사용하는 모든 전력을 충분하게 공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이날 오전에는 커리지호 상층부인 갑판(DECK)을 둘러봤다. 갑판 안내를 맡은 강민성 1등 항해사는 “축구장 2~3개의 크기”라며 “넓기도 넓지만 모두 철재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며 안전을 당부했다.
최대 4696TEU를 적대할 수 있는 갑판에서는 거대한 컨테이너보다 붉은색의 각종 안전설비가 눈에 띄었다.
강 1등항해사는 “화재, 조난 등 위험에 항상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일정 거리마다 소방시설, 구명튜브 등을 갖췄다”라며 “이 설비들은 일정거리마다 갖추고 있다”라고 말했다.
커리지호는 선박 화재에 철저한 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강 1등항해사는 이동 중 한 철제구조물을 가리키며 “이 방에는 이산화탄소(CO2)를 담은 병이 수 백 개가 들어있다”며 “기관실 등에 화재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질식소화를 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시간 가까이를 걸어 선미에 다다르자 선원복장을 한 마네킹의 모습에 짧은 비명을 질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람 크기의 마네킹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강 1등항해사는 “해적을 만났을 때 갑판에 철조망과 마네킹을 같이 세워 그들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라며 “선원들과 정기적으로 훈련을 하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둘러본 커리지호는 선교, 갑판, 기관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커다란 생명체와 같았다. 그 일사분란함이 거대한 컨테이너선 커리지호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바다는 커리지호가 예정된 날짜(10월 28일) 상하이에 도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커리지호 구석구석을 돌아본 그 시각, 지난달 23일 일본 동해상에서 소멸한 제21호 태풍 ‘란’이 지나온 길을 따라 올해 22번째 태풍인 ‘사올라(SAOLA)’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