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책은 사람을 이어준다

2017-11-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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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 메디치미디어 편집장

[사진=정소연 메디치미디어 편집장]

 맞은편 남자 노인이 일어서더니 내 옆에 앉아 있는 여학생에게 다가왔다. 요즘 지하철에서 이런저런 소란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나는 슬며시 불안해졌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책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슨 일일까? 눈에 띈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학생, 지금 '데미안'을 읽을 정도면 책을 많이 읽는 거야. 아주 좋은 시기에 읽고 있어." 노인은 뜻밖의 격려를 남기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러고 보니 그 역시 무언가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곧 안심했고, 여학생은 살짝 미소까지 지었다.

몇 달 전 일이지만, 그 장면은 여전히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책이라는 매개체가 없었다면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상이 빨리 변하는 만큼 세대 간 격차도 커진 세상 아닌가. 공통점이 전혀 없는 타인 간에 무엇을 통해서 그런 마음이 전해질까? 같은 옷을 입은 상대와 마주치면 개성이 침범당한 것 같아 오히려 머쓱해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읽었던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한 번 더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나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다. 최근에 와서야 출판은 '사람 간의 연결'이란 말을 깨달았다. 편집자가 아무리 뛰어난 기획을 해도, 원고는 저자로부터 나온다. 책 만드는 과정은 또 어떤가?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 수많은 이들의 생각이 엮어져야 한다. 디지털이 넘치는 시대라 그런지 종이라는 '물성(物性)'이 오히려 주목받고 있지만, 책이야말로 독자의 손에 이르는 순간까지 '사람'이 '소통'을 이어받는 프로젝트다.

이건 두 가지 면에서 출판인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나처럼 큰 포부 없이 책이 좋아서 출판을 하게 된 사람들은 사실 사람을 묶어내는 능력은 변변찮은 경우가 많다. 대개 많은 이들이 상상하듯, 골방 같은 사무실에 앉아서 온종일 원고에 파묻혀 지내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도 꽤 될 것이다. 하지만 책이 독자의 선택을 받으려면 공감할 만한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저자를 포함해 함께 일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부터 끌어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1인 출판 역시 바깥 영역에 있는 많은 이들과 작업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두 번째는 좀 더 심각한 내용이다. 하루가 다르게 출판 시장의 전체 규모가 줄어들고 독자의 취향이 세분화되면서 출판사들은 잘되건 못되건 고민이 많다.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더는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들을 한다. 거기서 우선순위에 올리는 것이 독자와의 만남이다. 출판은 솔직히 저자 지향적인 면이 컸던 비즈니스다. 독자에 대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몰랐다. 서점에서 책이 팔리기 때문에 제조사인 출판사에는 판매 관련 데이터가 부족하다. 빅데이터 분석은 꿈도 꿀 수 없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누가 살까 하는 궁금증이 일 정도로 구체적인 독자의 모습이나 구매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며칠 전 만났던 한 대형 인터넷 서비스 회사의 대표는 이런 조언을 했다. "출판사가 지향하는 어떤 가치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세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책이 알려지고 판매될 겁니다."

많은 출판사들이 SNS를 꽤 열심히 하지만 아직까지는 홍보성 작업으로 많이 비쳐진다. 그렇지만 이제 출판사들도 독자와의 만남을 진지하게 궁리하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이 업계에는 나서지 않으려는 성향의 사람들이 많아 쉽지 않긴 하다. 또 독자를 잘 알지도 못하고 직접 만나본 경험도 적기 때문에 의욕적으로 나서도 서투를 것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다가간다면, 지하철 노인과 여학생이 통했던 것처럼 책은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어줄 것이라고 나는 낙관적으로 보고 싶다.

출판계 최고의 기획자로 꼽히면서 편집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오래 해온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자를 5~6년 일단 만나려고요. 어떻게 만나야 할지는 저도 난감합니다. 하지만 의도를 갖고 만나면 지금의 독자들은 바로 알아챌 거예요. 우선은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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