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처신난(處身難)

2017-10-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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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재벌이든 사업가든 오너에겐 '삼심(三心)'이 있다고 한다. 욕심, 의심, 변심이다. 돈을 향한 욕심에 한도는 없다. 9999억원을 가졌어도 1억원 모자람을 안타까워한다. 늘 의심 품은 눈초리로 주위를 살피며, 마음도 조석변(朝夕變)이다. 충성을 바친 월급쟁이 CEO쯤이야 ‘흉년 모가지’이다.

권력도 그렇다. 꼭짓점을 향한 욕망에 브레이크는 없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선량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천덕꾸러기 신세다. 나뭇가지든 동아줄이든 꽉 잡고 매달린다. 미구(未久)에 부러지거나 끊어질지라도. 누군가 찌를까 늘 뒤를 조심하며. 의리는 이미 견공에 던져줬다. 자신을 이끈 은인이라도 걸림돌이 되면 ‘거름 막대기’쯤이다.
선비는 다르다. 욕심은 더욱 정진해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둠을 밝히는 빛,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게으름을 자책하며 혹시나 길을 잘못 들지 않았는지 늘 경계하는 이유이다. 결단은 충절과 신의의 상대를 방벌(放伐)할 때이다. 이때 선비의 변심은 무죄다.
맹자는 말한다. 백성은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고. 오로지 선비만이 자산이 없어도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선비 '사(士)'가 하늘을 향해 머리(상투)를 꼿꼿이 세운 모습인 것은 그래서일까.

하지만 바른 마음을 유지하기가 어디 쉬운가. 공자가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이라고 했지만, 뒤집어보면 한창 물오른 40대에는 유혹이 많다는 뜻이리라. 나이 예순을 이순(耳順)이라 했지만, 어디 나이 먹었다고 마음 자리가 다스려지던가. 오히려 고집불통으로 흐르지 않던가.

역시 처신(處身)이 문제다. 매우 송구하거나 심히 부끄러울 때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한다. 마음이 거북할 때만 모르는 게 아니다. 평소에도 모를 것이 바로 ‘몸 둘 바’, 처신이다. 세상사 희로애락을 당하여 마땅히 처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다. 처신을 보면 품격을 알 수 있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품격은 역경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을 때는 자못 품격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 몰아칠 때라야, 즉 세한연후(歲寒然後)라야 송백(松柏)이 늦게 시듦을 안다. 역경은 인품을 담금질하는 풀무요,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는 양약(良藥)이다. 공자도 “불우하고 고난에 처했을 때 꿋꿋이 부드러운 자세를 잃지 않아야 참된 품격의 소유자”라고 했다.

조선 정조 시대다.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선비들이 자리를 탐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탄식한다. “난진이퇴(難進易退)가 아쉽다.” 벼슬길에 어렵게 나가고 선선히 물러난다는 뜻인데, 정조는 그것이 조정을 높이고 세교(世交)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헛된 명리를 붙들고 매달리는 풍조에 예의와 염치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맹자가 말한 행장진퇴(行藏進退)도 같은 말이다. 지식인에게는 관직에 나아감과 물러섬을 아는 자연스런 처신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채근담엔 “박만(撲滿)은 비어야 온전하다. 군자도 무(無)에 거하고, 모자란 곳에 머문다”는 욕심을 경계하는 글귀가 나온다. 박만은 흙으로 만든 저금통인데, 돈이 가득 차면 꺼내기 위해 깨뜨리게 되므로 비어야 온전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다. 더 있다. “인정은 변하기 쉽고, 세상 길은 험난하다. 힘든 길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고, 쉬운 길에서도 조금 양보하라.” 바로 한 걸음 물러남, 퇴일보(退一步)가 인생의 지혜라는 가르침이다.

노자의 도덕경도 할 일을 다 했으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고 설파하고 있다. “넘치도록 가득 채우기보다 적당히 멈추는 것이 낫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면 쉬이 무디어진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이를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 재산과 명예로 교만하면 반드시 허물을 남긴다”고 했다. 따라서 “공수신퇴(功遂身退)가 천지도(天之道)”라는 것이다.

말이 길었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처신이 아쉽다. 그는 꼼꼼하고 성실한 재판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꼴사납게 권한대행을 유지하면서 헌법재판소의 위상도 떨어뜨리고, 문재인 대통령도 어렵게 하며, 국회의 민의 대변 기능까지 부정하고 있다. 

사실 국회 청문회에서 부결됐을 때 ‘권한대행’을 고사해야 했다. 동료 재판관들이야 말리기 어렵지 않겠나. 자신이 “나는 국회에서, 즉 국민의 뜻으로 부결된 터이니 다른 재판관을 권한대행으로 뽑아 주세요”라고 말했어야 했다. 권한대행을 극구 사양했어야 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자리 욕심에 분별력이 흐려졌기 때문이리라. 그러고는 대통령이 후임 재판관과 소장을 빨리 추천하지 않아 헌법재판소의 파행이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안함에 미적거린 문 대통령으로선 서운할 일이다.

결국 선비정신이다. 헌법재판관이면 명예의 꼭짓점, 선비의 표상 아니겠나. 하지만 항심(恒心)을 잃으면, 선비 사(士)가 아니라 고개 꺾인 공(工)일 뿐이다. 한순간 머뭇거림으로 본인의 명예가 떨어지고, 우리는 선비를 잃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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