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위치한 대학의 만화과를 졸업한 뒤 처음 일을 얻은 곳은 애꿎은 미네소타주의 한 출판사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대상의 만화책 프로젝트로, 등장하는 아이들은 막 중학교를 입학한 13세 아이들이었다. 캐릭터 작업을 하면서 흥미롭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내가 처음 그린 캐릭터들에 대한 한국과 미국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한국 친구들은 “제 나이로 보인다”는 반응이었고, 미국 동기들은 “18세에서 23세까지로 보인다”고 했다.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왜 영미권에서는 ‘아이’를 더 어리게 생각하는 걸까?
내가 종사하는 만화·애니메이션 업계를 예로 들자면, ‘스티븐 유니버스’(영미권 애니메이션)의 꼬마 스티븐은 ‘테니스의 왕자’(일본 애니메이션)의 료마보다 형이다. 왜 동양사회가 묘사하는 청소년은 ‘준 어른’인데 영미권이 묘사하는 청소년은 ‘준 어린이’일까?
미디어에서 아이들의 행동과 실수를 당연한 것으로 묘사하는 건 아이들이 마음껏 실수하며 자라날 수 있는 ‘마진’을 만든다. ‘아이니까’ 넘어갈 수 있는 미디어가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약자에게 너그러운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본받을 만한 면이라고 본다.
두 번째로는 동양 사회가 아이의 시각으로 진행하는 스토리가 더 많기 때문이다.
영미권 콘텐츠의 경우 메인 캐릭터가 어린이인 경우에도 전지적 시점이나 성인 어른의 시점으로 주인공을 바라보는 형식으로 연출하는 경우가 더 많은 반면, 동양권 콘텐츠는 독자나 시청자가 어린 주인공에게 이입해서 상황을 바라보는 1인칭 시점으로 연출되거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우가 많다. 성인들도 이입될 수 있는 캐릭터여야만 하는 동양권 청소년 캐릭터들이 ‘나이답지 않게’ 점점 더 성숙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정적으로 위 요인들에 힘이 실리는 것은 ‘동양사회가 어린아이를 페티시(Fetish, 특정 물건을 통해 성적 쾌감을 얻는 것)하는 경향이 강해서’가 아닐까 싶다.
영미권 미디어의 아이들은 똑똑하고 어른스러워도 분명 ‘아이’인데, 동양 미디어 속 아이들은 성인과 연애가 가능할 정도로 성숙하고 또 성인인 상대를 휘두르지 못할 정도로만 미숙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중학생 정도만 돼도 너무 성숙해서 소아성애로도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다. 이러한 기묘한 동양식 콘텐츠는 만화·애니메이션을 넘어 브라운관에까지 확장됐다. 올 초에는 고등학생과 중년의 남성이 연애하는 내용을 담은 드라마가 ‘국민 드라마’까지 되었으니까.
물론 영미권에서도 청소년들의 성적 매력을 소비하는 콘텐츠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소비하는 이들이 ‘수치스럽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동양권에서는 특정 도착증이 아닌, 자연스러운 메인 스트림(Mainstream, 주류)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상의 젊음에 이입한 어른들이 실제 청소년들의 젊음과 성을 탐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특정 옷과 외형을 젊음과 연관지어 터부시하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어린 사람은 세상이 낯설다. 많은 휴식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 바른 성인과 같은 사회에 살기 위해 소비되지 않고 “어린 사람은 어릴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런 삼라만상이 머리에 스치는 동안, 나는 더 열심히 아이들을 더 ‘아이’답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