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비리 스캔들로 퇴진 압박을 받아 온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가 조기총선 가능성을 시사했다.
지난 18일 싱가포르 현지매체 연합조보(聯合早報)에 따르면 나집 총리는 최근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당사에서 본 회의를 주재한 뒤 "언제든 좋은 기회가 생기면 총선 투표를 진행할 것"이라며 조기총선에 대해 암시했다.
말레이시아의 다음 총선은 원칙대로라면 2018년 8월 열려야 한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나집 총리의 최근 발언 등을 인용해 연말쯤 조기총선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최근 들어 여당과 야당 역시 두드러진 정치 행보를 보이면서 이미 총선을 염두에 둔 선거운동 모드에 돌입했다.
지난 1957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말레이시아는 단 한번도 정권교체가 없었다. 다만 이번 선거는 나집 총리가 말레이시아 국부펀드 1MDB(1Malaysia Development Berhad)를 통해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횡령한 의혹은 받은 후 처음으로 치뤄지는 선거라 큰 의미가 있다는 지적이다.
1MDB 스캔들뿐 만 아니라 국립축산조합(NFC), 포트클랑 자유무역지대(PKFZ) 등 각종 국책사업의 방만한 경영과 측근들의 비리 스캔으로 얼룩진 나집 정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1MDB는 2009년 나집 총리가 국내외 자본을 유치해 경제개발 사업을 하겠다며 설립한 회사다. 나집은 지난 2015년 말 발생한 천문학적 부채에 대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최소 10억 달러(약 1조1330억 원)이상의 자금을 스위스·싱가포르 등지로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은 미국 법무부까지 나서 나집 총리가 구매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동산과 예술품을 압수하는 등 국제적인 형사사건으로 발전했다.
자금은 주로 나집 총리와 측근들의 사치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횡령 혐의와 더불어 로스마 만소르 여사의 사치 소비 성향도 구설수에 올랐다. 한화로 약 1억 원 남짓인 총리 연봉 외에 기타 소득이 없으면서도 로스마 여사는 2008년부터 2016년 사이 65억 원이 넘는 보석과 명품을 구매해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나집 총리는 자금 횡령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반대파의 음모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지지층도 생각보다 견고하다. 지난해 5월 치러진 말레이시아 사라왁주 의회 선거에서 나집 총리가 이끄는 집권여당 연합인 국민전선(BN)은 82석 중 72석을 차지하면서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야당인 신야권연합 희망연대(PH)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7월 PH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간 총리를 지내며 말레이시아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마하티르 전 총리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올해 92세인 그는 한때 여당의 실세로 군림했었다. 하지만 나집 총리의 횡령 의혹이 불거지자 야권에 합류해 '반(反) 나집' 행보를 계속해왔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18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총선에서 야당 대표로 출마해 나집 총리를 실각시키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또한 정권교체를 위해 20년 숙적인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와 연대를 맺은 점도 눈길을 끈다.
이번 총선에서 야당은 나집 총리의 1MDB 관련 자금 횡령 혐의를 집중 공략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여당이 국영펀드를 선거운동 목적으로 유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점도 야당으로선 이득이라고 볼 수 있다.
싱가포르 일간지인 더스트레이츠타임스(The Straits Times) 편집장 한훅쾅(Han Fook Kwang)은 “이번 총선에서 젊은 세대와 화교는 야당에게, 무슬림과 말레이계는 집권여당에게 표를 몰아줄 것으로 예상한다”며 “나집은 무슬림 우대정책을 홍보하며 유권자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는 종교적·인종적 갈등을 부추겨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탄탄한 말레이계 지지세력과 야당 내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정권교체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있다. 하지만 변화를 갈망하는 대다수 청년 유권자들이 야당 지지로 쏠릴 경우 압승으로 지도력 회복을 노리는 나집 총리에게는 큰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