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근본을 바꾸는 대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최강의 군대로 태어날 수 있었다는 얘기다.
▶ 천호제로 시스템 근본 개조
▶ 십진법에 기초한 군사조직
현대의 군대 조직은 통상 분대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그리고 사단과 군단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체계다. 몽골의 천호제도 형식은 현대 군대조직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구성단위가 10진법에 근거를 주고 있다는 데 차이가 있다. 천호제는 열 명을 기본 단위로 하는 십호에서 출발한다.
십호에는 그 십 호를 다스리는 십호장을 둔다. 십호가 열 개 모이면 백호가 된다. 백호가 다시 열 개 모이면 천호가 되는 것이다. 만호가 생겨나기는 했다. 만호는 나중 17세기에 투멘(Tymen)이라는 이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칭기스칸 시대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천호제의 기본 줄기는 역시 천호였다. 천호가 몽골 군대의 기본 조직이자 최대의 조직이었다.
▶ 순수 몽골인 집단으로 출발
95개의 천호 조직 됐을 때 소속된 병사들은 거의 몽골인 이었다. 그러나 이후 유목 키타이족(거란족)들이 대거 천호제 체제 안으로 편입되고 세계정복전쟁으로 여러 종족의 병사들이 보태지면서 칭기스칸이 사망할 당시 천호의 수는 129개로 늘어났다고 집사는 기록하고 있다. 몽골군이 수십만 명으로 늘어난 시점에서도 천호에 소속된 병사가 13만 명 정도였다는 것은 그만큼 천호제가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3분할 체제로 정주권과 대치
또 우현왕이 관장하는 우익은 기련산에서부터 서쪽으로 타림분지와 천산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흉노와 평생 동안 한판 승부를 벌였던 한 무제(漢 武帝)가 동쪽 한반도에 낙랑 등 한사군(漢四郡)을 둔 것이나 서쪽에 무위, 장액 등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한 것은 바로 흉노의 좌우익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을 본 딴 칭기스칸의 조직은 동쪽에 배치된 좌익은 무칼리가 지휘했고 우익은 보르추가 맡았다.
▶ 철저히 능력 위주로 운영
"소르칸 시라로 말하면 타이시우드의 속민이었다. 바다이와 키실릭으로 말하자면 체렌의 말 치기였다. 이제 나의 지팡이가 돼 살동개(화살을 넣는 주머니: 시복(矢箙))를 휴대하고 의식의 잔을 비우며 자유를 즐겨라"
연공서열과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하는 혁신적인 조직 운영은 기존의 기득권을 가진 부족장이나 씨족장은 불만스러워 했지만 일반 병사들과 백성들은 크게 환영했다.
▶ 연대책임 통해 조직 결집력 높여
천호제를 운영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특징은 철저히 연대책임을 물음으로써 조직의 결집력을 높였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예가 칭기스칸이 남긴 대자사크에 잘 나타나 있다.
"공격할 때나 퇴각할 때 앞의 병사가 무기나 짐을 땅에 떨어뜨렸는데도 뒤에서 따라가던 병사가 그 것을 주워주지 않을 경우 사형에 처한다."
몽골제국을 방문했던 프랑스의 수사 카르피니의 견문록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십호에서 두 세 명 이상이 도망치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처형돼야 한다. 십호 소속원 전원이 도망치면 백호의 나머지 사람도 모두 처형돼야 한다. 십호 소속원 가운데 적에게 붙잡힌 병사가 있을 경우 다른 사람들이 구해 내지 못하면 처형돼야 한다."
▶ 전투력 높인 군사조직체
군율을 바탕으로 한 조직 운영은 공포심을 자아낼 만큼 엄격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연성이 부족하고 자칫 사기가 저하될 수도 있었지만 다른 여러 보완장치로 우려되는 부분을 상쇄 시켜줬다. 천호제 안에서 집단 처형의 사례가 기록에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천호제는 전투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군사 조직체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