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학교에서 ‘근거없이’ 이루어지고 있던 ‘돌봄’, ‘방과후 활동’이 공론의 장으로 나온 것은 참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봄관련 조례를 박영송 세종시의원이 발의하였다는 것을 듣고, 평소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박 의원의 교육에 대한 애정에 대해서 겪은 바 있었으므로, 그 진정성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는다.
교육정책은 다른 것과 달라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 이상적인 정책은 상상하고 제안할 수 있으되, 그것만을 고집해서는 안되는 것이 교육정책이다.
교육정책은 ‘현재의 조건에서, 실현가능한 것을, 지금 당장 결정해서 집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초등학교에, 중학교에, 고등학교에, 그리고 유치원에 우리 아이들이 있고, 이들을 대상으로 지금 당장 뭔가를 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교육정책을 논쟁함에 있어서 ‘추상적인 용어’가 아닌 ‘실현 가능한 구체적 언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요즘 청소년 범죄에 대한 ‘처벌’에 대한 논쟁에서 허망하게 느끼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어른들의 책임이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말인가? 지금 당장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절대 진리는 서두에 한 문장으로 족하고, 이후 구체적인 대안, 정책,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일... 이런 것들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내어놓고 채택하는 대안은 ‘현재의 조건에서 지금 당장 채택 가능한 대안’일 뿐이다.
유치원 돌봄의 경우, 맞벌이가 아님에도 학부모들은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맡아주길 바라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맞벌이는 어쩔 수 없이 유치원이 맡더라도 홑벌이의 경우에는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 교육적으로나 아동의 심리적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니 유치원 돌봄은 맞벌이만 담당하도록 하자.
이 주장이 벽에 부딪쳤다. 홑벌이 부모들의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만일 유치원이 아이들을 맡아주지 않으면 유치원 마친 아이들을 학원으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나는 당시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책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상황이 우리 현실인 것이다. 우리가 자랄 때에는 학교마치고 돌아와도 아이들의 할 것이 많았다. 집 앞 골목에 가면 항상 친구들이 있었고, 그 골목길에는 차가 다니지 않아서 안전한 놀이터였으며, 아이들이 노는 주변에는 항상 어른들이 있었다.
지금은 면단위 시골에는 같이 놀 친구들이 동네에 없고, 도시에서는 맞벌이 아이들은 학교에 있고, 홑벌이 아이들 역시 위험한 놀이터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파트 거실에서 아이들이 할 일이 마땅치 않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유치원 돌봄이 아이들을 맡게 된다. 대안이 있다면, 홑벌이 가장의 어머니들이 공동육아 형태로 유치원 시설을 이용하거나 유치원 시설과 다른 시설을 함께 이용해서 일부 과정을 담당하는 방식을 도입할 수는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돌봄의 일부라도 부모들이 공동육아의 형태로 맡도록 하는 것 최대치라는 생각이다.
방과후 활동이 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올바른 논쟁도 아니다. ‘교육과정 이외의 활동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활동을 ‘사교육’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방과후 활동은 국가와 지자체(교육지자체를 포함하는)가 담당하여야 하는 ‘공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정규교육과정이 끝나고 귀가할 경우에는 모든 것이 사적 영역으로 맡겨져서 각 가정의 경제적 부담은 물론, 집안 형편에 따른 활동의 차이,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해질 수 있다.
지금까지 진행해온 방과후 활동이 문제는 많지만 내가 사는 시골에서도 방과후 사교육걱정을 덜어주고 있고, 이는 도시 지역도 만찬가지다. 일단 그런 공적인 역할과 그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를 해줄 수 있다.
아울러, 조례가 ‘상위법령의 위임이 없다’거나 하는 식의 논쟁 역시 생산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나의 판단으로는 조례로 방과후 활동을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 조례의 내용에 논쟁거리가 있을 뿐이다.
나는 평소 교사들이 방과후 활동을 조직, 관리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보아왔으며, 이런 업무는 교사들에게 ‘과중한 행정업무’라고 생각해왔다. 방과후 활동의 진행을 한두명의 교사 가 관리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현재 방과후 활동에 대한 교육감들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고, 일반 자치단체에서 이 부분을 맡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발의되었다. 앞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가 아닌 다른 형태의 방과후 활동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지자체가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될 방과후 활동이 어떤 형태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하며, 이러한 것들이 상위 법령이나 조례 등의 형태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조례에 ‘근본적인 해결’은 담기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준비가 부족하고, 여건이 불비하며, 이해를 가진 당사자들의 주장과 욕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가 사는 현실의 세상이다.
그래서 이런 부족함이 한계가 되어 법령이나 조례에 담기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개정’의 과정을 거쳐 변화하고 개선될 것이다.
세종시 의회의 조례는 일단 제정되었으되, 그 시행은 잠시 유보하고, 이해를 가진 당사자들의 논의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조례의 내용으로 볼 때, 내년 봄까지 당장 해야 할 일도 없으니 시간 여유는 있다고 본다.
각각의 이해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내어놓고,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현재 조건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들을 도출하는 논의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사들이 조례를 접하면서 그 동안 학교현장에서 어려웠던 것들을 “공교육, 사교육”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교사들이 자신의 교육과정내의 수업진행에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호소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공동으로 모색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논쟁이 ‘원칙 논쟁’으로 가면 논의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방과후 활동은 사교육이다”라거나 “교사는 교육하는 사람이지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은 아니다”라는 식의 ‘규정 짓기’를 하고 나면 그 이후의 논의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지금 학교에서 방과후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일정한 사회적 요구가 있기 때문이고, 다른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규정하고 나면 그 중간단계에서의 ‘실현 가능한 대안’은 도출하기 어렵다. 추상적 논쟁은 합의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까칠한 발언’들은 구체적 대안에 대한 논쟁이라기보다는 ‘사안을 규정하는 주장’에 대한 논박인 경우가 많다. 이런 것들로 서로 마음을 다친다. 서로 도와서 함께 일을 해야 할 사람끼리 벽을 쌓는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면 서로 이해하고 합의가 가능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곳에서 마음을 다친다.
차라리 현재 방과후 활동에서 각각의 이해 관계자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공동으로 모색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추상적인 논쟁이 아닌 구체적인 대안마련을 모색하자는 말이다.
모여서 논의하고, 그 내용을 만들어보면, 지금 제정된 조례를 고칠지, 아니면 새로 만들지를 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현재의 조건에서 실현가능한 것을 지금 당장 집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침으로 도출하고 그 내용을 조례로 할 것인지, 교육감 규칙으로 할 것인지, 예산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필요한 것인지 등을 찾아내는 일 등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