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딜레마에 빠졌다. 헌정 사상 초유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 후폭풍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야권을 향해 “정권교체 불복 세력”이라고 공세를 취했지만, 강경 노선 일변도로는 닫힌 협치의 문을 열 수 없다.
한때 ‘한 지붕 가족’이었던 국민의당과 본격적인 공조 행보에 나설 경우,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실상 독점한 ‘호남의 문’ 일부를 내줘야 한다. ‘협치냐, 대치냐’의 갈림길에 선 정부·여당의 현실이 녹록지 않은 셈이다.
◆與 “野, 정략 좇는 불나방”··· 국민의당 관계설정 어쩌나
12일 ‘김이수 부결’ 후폭풍을 둘러싼 여야의 공방전 수위는 한층 고조됐다. 겉으로는 ‘강 대 강’ 구도였지만, 여야 내부적으로 각각 ‘주도권 실기’, ‘역풍’ 등에 대한 우려도 곳곳에서 포착됐다.
민주당은 이날 국회에서 원내대책회의와 의원총회를 열고 후속 대책 마련에 나섰다. 당 의원들의 만류로 사퇴 의사를 접은 우원식 원내대표는 “힘이 모자랐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일부 의원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격앙된 발언을 쏟아냈다.
박홍근 원내수석부대표는 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을 향해 “신(新) 3당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김태년 정책위의장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지목하며 “오만하게 보였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또한 이날 의총에서는 △이명박근혜 정부 권력형 취업비리 청탁 국정조사(국조) 및 검찰 재조사 △지난 10년간 공영방송(KBS·MBC) 국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조사 특별법 당론 채택 등이 제안됐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보수야당, 세 번째는 국민의당의 ‘호남 홀대론’에 대응하려는 포석이다. 의총에서는 국민의당에 대한 비토와 함께 새로운 관계설정에 대한 의견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文정부, 협치 못하면 ‘식물정부’··· 한국당 대여공세 최고조
문제는 이제부터다. 여당이 대야 공세 전선을 넓힐 경우 당장 ‘발등의 불’인 인사 표결부터 험로에 빠진다. 국회에 따르면 내년까지 국회 임명 동의를 요하는 공직자는 ‘포스트 김이수’를 비롯해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황찬현 감사원장 후보자(올해 말 임기 만료), 국회 선출 헌법재판관 3인(내년 9월 임기 만료) 등이다.
정부의 개혁입법안도 난제다. ‘김이수 부결’은 민주당(120명)이 정의당(6명)과 친여 성향의 무소속(2명)을 끌어들여도 야 3당의 협력 없이는 어떤 법안의 통과도 장담할 수 없다는 ‘부정의 시그널’이다.
국민의당은 ‘박성진 사태’를 비롯해 류영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 등의 정리를 요구한 상태다. 박지원 전 국민의당 대표는 ‘김명수 표결’ 전망에 대해 “국회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일침을 놓았다. 국민의당과의 관계 설정이 문재인 정부가 ‘식물 정부’로 가느냐의 분수령인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북핵 등 안보 위기로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크게 하락한 상태다. 내치가 흔들리면 꼬인 외치 해법도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나 전술핵 재배치에 따른 추가 비용은 경제 문제와 직결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방위비분담금 협상도 마찬가지다. 정부 위기론이 경제 문제와 맞물릴 경우 중도·보수층의 이탈은 불가피하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이날 본지와의 통화에서 “당·청의 시급한 일은 한국당과 국민의당으로부터 협력을 끌어내는 것”이라며 “향후 당의 ‘추미애·우원식’ 라인보다는 청와대 주도로 난국을 돌파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당은 이날 민주당과 정부의 방송장악 진상규명을 위한 국조 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하며 투쟁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정우택 원내대표는 야당 책임론에 대해 “적반하장의 극치”라며 향후 험로를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