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살인자의 기억법' 설경구, 새로운 패(牌)를 꺼내다

2017-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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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연쇄살인범 병수 역을 연기한 배우 설경구[사진=(주)쇼박스 제공]

더 이상 꺼낼 패(牌)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 영호(영화 ‘박하사탕’)를 지나 성실한 은행원 봉수(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왈패 형사 철중(영화 ‘공공의 적’), 자신이 김일성이라 믿는 무명 배우 성근(영화 ‘나의 독재자’)에 범죄조직의 1인자를 노리는 재호(영화 ‘불한당’)까지. 배우 설경구(50)는 매 작품 다른 패를 꺼내왔으니까.

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캐릭터를 연기한 만큼, 일각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모습이 있겠냐”며 우려 섞인 반응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설경구는 여봐란 듯 단숨에 새로운 패를 꺼내 들었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을 통해서다.

영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 병수(설경구 분)가 태주(김남길 분)를 연쇄살인범이라 의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 중 설경구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지만 딸 은희(설현 분)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연쇄살인범 병수를 연기했다.

최근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가진 설경구는 “고민 없이 ‘살인자의 기억법’을 선택했다”며, “고민해왔던 부분을 해결해준 작품”이라고 말했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연쇄살인범 병수 역을 연기한 배우 설경구[사진=(주)쇼박스 제공]


“이 작품을 만날 때쯤 저의 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어요. 수년간 참 편하게 연기해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선보였던 연기들을 조금씩 바꿔가며 공허하게 연기했어요. ‘이러다 훅 사라지겠구나’하고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죠. 그러던 차에 ‘살인자의 기억법’을 보게 되었는데 어찌나 고맙던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모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캐릭터라서 더욱 끌렸어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 연쇄살인범 병수는 해석이 쉽지 않은 캐릭터였다고.

“소설 속 병수의 캐릭터만 가지고 있었다면 이처럼 끌리지 않았을 거예요. 그저 ‘궁지에 몰렸겠다’고만 느꼈겠죠. 극 중 병수는 연쇄살인범이지만 나름 정당성을 부여받은 인물이에요. 감독님이 여러 부분에서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도록) 여지를 줬죠. 소설과 다른 면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설경구의 말마따나 소설 속 병수는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물. 설경구는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부성애 코드”라고 밝혔다.

“영화 속 병수는 가족과 딸을 무척 사랑해요.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살해하고 딸 은희를 애지중지 키우는 등 원작에는 없는 가족애와 부성애가 도드라지죠. 원작보다는 온기가 있어요. 그 때문에 원작 속 껍데기만 가져오려고 했죠.”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연쇄살인범 병수 역을 연기한 배우 설경구[사진=(주)쇼박스 제공]


껍데기는 설경구에게 가장 큰 고민이자 불안 요소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정보다 외형에 신경가 쏠려 집중을 못 할 정도”였다고. 하얗게 센 머리며 거친 피부를 가진 노인의 얼굴이 낯설어 “보는 이들이 설득당할 수 있을까” 내내 마음을 졸였다.

“가짜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몰입이 깨져버리잖아요. 영화 ‘나의 독재자’의 경우는 분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살인자의 기억법’은 최대한 분장을 걷어내려고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모양이라든가 얼굴 톤, 잡티 등에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남들이 보지도 않는데 외적인 모습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원 감독 역시 설경구만큼이나 극 중 병수의 외형에 많은 신경을 썼다고. “병수는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인물인 만큼 특수 분장을 배제”하고 “미세한 표정과 경련을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병수의 성격이 한눈에 보이길 바랐죠. 덜어내고 덜어내서 건조하고 담백한 느낌이 들었으면 했어요.”

이번 작품을 위해 설경구는 10㎏ 이상 체중을 감량했다. “살을 빼야겠다는 강박”이 어찌나 심했는지, “얼굴 좋아졌다”는 인사치레에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 “상처를 받기도 하고 긴장하고 사소한 것에 예민해”졌다고.

“살을 빼고 촬영장에 나타나니 다들 깜짝 놀라더라고요. 원 감독이 매우 걱정하면서 ‘왜 이렇게 말랐어요’라고 하는데 그게 제 귀에는 ‘참 잘했어요’로 들렸어요. 병수라는 캐릭터 자체에 강박을 느꼈던 것 같아요. 어떤 고민인지도 모른 채 내내 고민에 시달렸죠. 병수는 정상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상적이지 않은 인물도 아니니까요. 묘한 지점에 서 있었어요. 저는 늘 병수를 연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한 번 해볼게요’라고. 딱 그런 마음이었어요. ‘한 번 해볼게요’라는 심정.”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연쇄살인범 병수 역을 연기한 배우 설경구[사진=(주)쇼박스 제공]


이준호(영화 ‘감시자들’)부터 임시완(영화 ‘불한당’), 설현(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 이르기까지. 최근 설경구는 아이돌 그룹 출신 연기자들과 제법 많은 작품을 함께 했다. 때마다 상대 배우와 환상의 케미스트리를 발휘했고 관객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기도 했다.

“준호를 비롯해서 시완이, 설현까지. 저는 단 한 번도 아이돌 출신이라 생각지 않았어요. 동료 배우라고 생각했죠. 배우들은 모두 처절하고 작품, 캐릭터를 위해 고민해요. 그건 나이와는 관계없죠. 때마다 다른 절실함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저 같은 경우는 나이를 먹을수록 시행착오와 오류를 범하면서 위기를 겪었어요. 정체기가 온 거죠. 연기를 처음 했을 때의 절박함이 시간이 갈수록 닳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 작품을 만나고 또 한 번 절실함을 느끼게 됐어요. 떨리고 절박해졌죠. 그 마음이 영화 ‘불한당’까지 이어지게 됐고요.”

설경구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매우 특별하고 고마운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작품에 대한 열정, 연기에 대한 절박함을 깨워주었기 때문이라고. 이런 변화는 오랜만에 설경구를 칸 국제영화제로 이끌어준 영화 ‘불한당’까지 이어졌다. 새로운 패를 꺼내든 설경구의 모습에 많은 여성 팬들은 환호했고 아이돌 그룹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게 됐다.

“인기요? 심하게 체감하고 있죠. 하하하. 젊은 친구들의 사랑은 처음 받아봐서….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해요. 여러 마음이 들죠. 그들의 응원에 보답하고 싶고요. 특히 작품 선택에 있어서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매번 ‘불한당’ 같을 순 없겠지만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선택한 영화도 같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죠.”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연쇄살인범 병수 역을 연기한 배우 설경구[사진=(주)쇼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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