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군상 속 두 여인의 엇갈린 삶을 그린 JTBC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극본 백미경·연출 김윤철)에서 김선아는 완벽한 삶을 동경한 박복자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상류사회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은 그는 단순히 악역으로 치부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 드리운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을 통해 시청자들을 설득했다.
최근 드라마 종영 후 아주경제와 만나 인터뷰를 가진 김선아는 박복자라는 인물이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기까지 많은 고민과 고충이 있었음을 털어놨다.
“대본을 받고 정말 흥미로웠어요. 하지만 이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과연 연기할 수 있는 인물인가 싶었죠. 도전하고 싶지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캐릭터였어요. 복자의 과거는 4부까지 밝혀지지 않는데 그의 어린 시절을 보기 전까지는 ‘왜, 복자가 이렇게까지 하려고 할까?’ 알 수 없더라고요. 나름 캐릭터를 받아들이고 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김선아가 박복자를 이해하게 된 시점은 언제일까? 그는 연기 선생님과 복자라는 인물에 관해 이야기하며 생각의 전환, 역발상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많은 이야기 중 저를 설득시켰던 건 백설 공주와 왕비의 이야기였죠. 우리가 알고 있는 백설 공주 이야기를 뒤집는 거예요. 왕비의 입장에서 거꾸로 백설 공주를 추적해나갔죠.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건 왕비라고 말하던 거울이 어느 날 갑자기 백설 공주가 더 예쁘다고 하니까. 화도 나고 당혹스럽지 않았겠어요? ‘도대체 누군데’하는 마음이 들었을 거예요. 찾아가는 방식도 그렇죠. 진짜 독이 든 사과였다면 먹고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을 텐데, 백설 공주는 목에 사과가 걸렸던 거잖아요. 그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왕비도 그리 독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거죠.”
김선아는 박복자에 왕비를 대입했다. 그는 박복자라는 인물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고 그의 내면에 깃든 외로움을 발견하게 됐다.
“복자는 외로운 사람이었던 거죠. 인형을 가지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갖지 못해서 종이 인형을 오리던 아이잖아요. 자기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가 이렇게까지 된 이유라고 봤죠.”
이후부터는 더욱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김선아는 박복자의 근원적 외로움을 발견하고 모든 행동과 인물들에 연결했다.
“특히 태동(김용건 분)과의 관계가 그랬죠. 태동을 아빠 혹은 친구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복자는 늘 사랑이 부족하고 그리웠던 아이라서. 돈으로 시작한 관계지만 이후에는 안 회장에 대한 마음이 있었다고 봐요.”
강한 욕망 뒤 숨어있는 외로움과 슬픔. 김선아에게 “복자가 가장 안쓰럽고 짠했던 순간”에 관해 질문했다.
“장면보다는 복자의 관계를 생각했어요. ‘복자는 단 한 번이라도 타인과 대화할 때 진심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몇 번이나 있었을까?’하고. 누구와도 진심으로 대화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 모습들이 굉장히 안쓰러웠죠. 늘 뭔가를 뒤집어쓰고 있고 자기가 아닌 것처럼 굴어야 하고 보여줘야 하죠. 2회 내레이션 중 ‘안 회장에 대한 마음이 전부 가짜는 아니었다. 세상에는 완벽한 진짜도 완벽한 가짜도 없다’는 대사가 있는데 그게 마음에 확 박히더라고요.”
김선아는 박복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돈이 아닌 따듯한 말 한마디”라고 했다. 그의 척박한 삶이 따듯한 말 한마디로 바뀔 수 있었음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듯했다.
“우아진과도 그래요. 우아진이 박복자에게 ‘어디서든 행복하세요’라는 쪽지를 주잖아요. 별거 아닌 말인데도 박복자는 그 쪽지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어요.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조차 없었던 거예요. 인생은 타이밍이라고들 하잖아요? 이상한 타이밍에 이상한 손길을 느끼고 그게 인생을 좌우하게 될 때가 있어요.”
김선아는 박복자의 타이밍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사소한 배려가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투였다.
“‘여인의 향기’를 찍을 때였어요. 당시 암 환자 역이라 굶는 게 일상이었는데 내리 햇볕을 쬐는 터라 정신이 없었죠. 덥고 힘들고 배는 고프고…. 까딱했다가는 정말 쓰러졌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스태프 한 분이 ‘걱정된다’면서 손에 초콜릿 세 개를 쥐여주더라고요. 별거 아닐 수 있는 그 행동이 평생 기억에 남아요. 스쳐 지나가는 일인데도 평생 내 마음에 남았던 거죠. 이런 일을 겪어서 그런 건지 아진이의 쪽지를 간직한 복자의 마음이 이해가 갔고 저 역시도 그런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힘쎈여자 도봉순’으로 JTBC 드라마에 힘을 실어준 백미경 작가와 세련된 연출로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김윤철 PD, 김선아·김희선이라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까지 총동원됐지만 ‘품위있는 그녀’ 첫 회 시청률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저는 시청률에 그리 신경 쓰는 편은 아니라서 타격을 입지는 않았어요. 김희선 씨가 얼마 전에 ‘시청률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실 조금 놀랐죠. 사전 제작 드라마니까 이미 제 손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덤덤했던 것 같아요. ‘내 이름은 김삼순’도 시청률 50% 나오고 했는데 사실 그게 많고 적은지 파악이 잘 안 되더라고요. 대신 첫 회보다 계속해서 시청률이 뛰고 마지막 회는 가장 높은 시청률이 나와서 만족스럽고 기쁘긴 했었죠.”
이제 ‘품위있는 그녀’ 그리고 박복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 김선아에게 이 작품과 박복자는 어떤 의미였는지 물었다.
“‘품위있는 그녀’는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었어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오고 어디든 몰입할 수 있죠. 아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거리가 많다는 게 연기하면서도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연락이 끊겼던 분들에게 다시 연락이 올 수 있게끔 도와준 작품이기도 하고요. 제에게도 오랫동안 특별한 작품으로 남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