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건설에 주춧돌이 된 너흐르들은 수십 명에 이른다. 하지만 사준사구로 불리는 여덟 명의 충복들!, 그들이 핵심 역할을 한 인물들로 볼 수 있다.
항심(恒心)을 가지고 충성했던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 고난의 시절에 만난 안다-보르추
보르추는 테무진의 사정을 알고 흔쾌히 나서서 사흘 낮밤을 함께 초원을 뒤지고 다녔다.
결국 잃어버린 말을 발견하게 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말을 찾아서 함께 도망쳤다. 그렇게 해서 테무진과 초원의 부자 아들 보르추는 안다가 됐다.
"달란 네무르게스에서 타타르와 대치하며 밤을 새울 때 비가 낮으로 밤으로 쏟아졌다. 그대는 밤에 내가 잠을 잘 수 있도록 제 외투를 덮어주고 내 위에 비가 아니 들도록, 밤이 다하도록 서서 제 한쪽 발을 단 한 번만 바꾸었다. 그대 의리의 표시였다. 그대의 숱한 의행을 어찌 이루 다 언급할 수 있겠는가? 보르추는 나의 옳음이 나아가도록 이끌고 나의 그름이 멈춰 서도록 말려 이 자리에 이르게 했다. 이제 만인의 상석에 앉혀 아홉 번의 과실을 책하지 않도록 하라."
그래서 아직 부족국가로서의 속성을 버리지 못한 몽골을 문화민족으로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 칭기스칸을 만들어낸 샤먼- 무칼리
칭기스칸은 무칼리에게 "우리가 코르크낙 주부르(자모카와 공동 유목을 한 곳)에서 야영할 때 무칼리에게 하늘이 계시를 해 알린 전조로 인하며 언약한 바 있다. 그 언약대로 ‘무칼리의 후손 대대로 모든 백성의 국왕 자리에 앉게 하라며 구이옹(권황제)이라는 칭호를 내린 바 있다. 무칼리 구이옹에게 몽골 동부 만호를 다스리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금나라를 정복한 뒤 중국 땅 동방 경영의 책임을 맡아 나중에 대원 제국 건설에 초석을 다지게 된다.
후일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동방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무칼리 후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쉽게 대원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무칼리가 죽은 뒤 그의 일족은 칭기스칸의 명대로 원나라의 4대 권문세족 중 하나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 형제처럼 함께 자란-보로클
보로클은 전쟁터에서 발견돼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에 의해 길러진 인물이다. 테무진과 함께 자라면서 형제 대접을 받았다.
몽골비사에는 다른 너흐르들 보다 비교적 길게 보로클의 공을 언급하고 있다.
"보로클은 내게 동무되어 급한 원정 중에도, 비오는 밤에도 빈속으로 아니 자게 했다. 적과 대치했을 때도 국 없이 아니 자게 했다."며 자신을 세세하게 챙겨준 것을 고마워했다.
특히 타타르인이 다섯 살 난 칭기스칸의 막내아들 툴루이를 납치해서 달아났을 때 그의 아내 알타니가 툴루이를 구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 둘째 아들 오고타이가 카라 칼지트 사막에서 케레이트족과 전투 중에 목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자 보로클은 오고타이의 굳은 피를 입으로 빨아내고 밤을 새워 그를 간호한 뒤 안전하게 피신 시켰다.
그러나 보로클은 1217년 몽골 북동쪽 삼림지대의 수렵민족 투마트 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해 비교적 일찍 칭기스칸의 곁을 떠났다.
▶ 위기상황서 구해준 칠라운
칠라운은 테무진이 포로로 잡혔다가 칼을 쓰고 탈출했을 때 테무진을 숨겨주고 탈출시킨 인물이다.
멸문지화를 두려워하는 아버지 소르칸 시라를 오히려 나무라며 형 침바이와 여동생 카다안과 함께 테무진을 보호해줬다.
칭기스칸은 나중에 "그대들의 공을 생각하며 검은 밤에는 꿈에서, 밝은 날에는 가슴에 생각하며 다녔다"며 고마워했다.
그래서 메르키트 땅 셀렝게를 목영지로 하사해 자손대대로 소유하게 했다.
최고 군주와 직접 대면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개인의 권력으로 악용하면 자신은 물론 조직이나 국가에도 독이 될 것이고 좋은 충고나 의견으로 군주를 바르게 이끌면 약이 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칠라운은 오고타이 대칸 때 금나라를 정벌하던 도중 전사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자손은 대원제국의 4대 권문세가 중의 하나로 권세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