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정부 출범 100일이 다 돼간다. 요즘 청와대에서는 ‘7to24'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문재인 대통령부터 각 수석실 행정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일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의 얼굴은 청와대 입성 석 달만에 ‘반쪽’이 됐다. 까칠한 피부에 푹 꺼진 눈, 바싹 타들어가는 입술. 광대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갈수록 수척해지고 있어 주변 지인들이 걱정을 할 정도라고 한다. ‘이러다 비서실장 치아가 20개는 빠지는 거 아니냐’는 웃픈 얘기까지 나온다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여정부 때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에 이어 비서실장을 거치면서 치아가 10개나 빠져 임플란트를 한 것에 빗댄 것이다.
오죽하면 임 실장이 브리핑마다 같은 넥타이를 매자 '퇴근 못하고 갇혀있는 임 실장의 구조신호'라는 유머가 나오고, ‘임종석 비서실장 퇴근미션'이라는 보드게임까지 온라인에서 회자됐을까.
이어 매일 아침 9시10분에는 여민관3층에 있는 문 대통령의 집무실에 모여 대통령과 국정 상황 회의를 한다. 고정멤버로는 임 실장과 윤건영 국정상황실장, 박수현 대변인 등이다. 여기에 현안에 관련된 각 수석비서관들이 참석해 머리를 맞댄다.
여민관2층에서 근무하는 임 실장은 수시로 문 대통령에게 불려 올라가거나 전화 통화를 하는 일이 잦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수시로 임 실장을 찾는 문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 구내전화로 임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교환하는 직원이 놀란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문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석보좌관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의 정책 안건과 메시지를 조율하는 사전 준비 역할도 비서실장 몫이다.
출범 후 두 달 동안 청와대 참모진과 내각, 공공기관 인사까지 인사추천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인사 추천과 검증을 진두지휘하느라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일부 장관 후보자가 낙마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인사시스템이 정치권과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고, 야당의 거센 반대 속에서 일자리추가경정예산과 정부조직법이 국회에 묶여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전병헌 정무수석과 우원식 원내대표가 야당을 끈질지게 설득한 끝에 협상안을 가져왔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결국 임 실장이 국회로 가서 정국의 실타래를 풀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명실공히 청와대의 2인자이면서도 대통령의 ‘그림자’다. 동시에 대통령의 눈과 귀이자 손과 발이다.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대통령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음을 깨우칠 조언자다.
문 대통령은 임 실장에게 “이견을 제기하고 토론하는 역동적인 청와대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임 비서실장이 이끄는 청와대 비서진은 소통이 자유롭고 거침이 없을 정도로 격의가 없다. 51세 최연소 대통령 비서실장 탄생이 말해주듯, 문재인정부의 청와대는 평균 연령이 50대 초중반으로 전 정부보다 무려 10년 이상 젊어졌다.
문 대통령이 ‘삼고초려’로 임 실장을 대선 캠프로 영입하고, 급기야 새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앉힌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다.
친문 패권 비판에 시달렸던 문 대통령은 호남 출신으로 김근태(GT)계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임 실장의 손을 잡으면서 비로소 ‘용광로’ 통합 선대위를 꾸릴 수 있었다. 균형잡힌 정무감각과 넓은 인맥, 원만한 성격과 친화력, 통합과 조정 능력이 뛰어난 임 실장의 진가는 선대위 구성에서부터 발휘됐다.
1980-9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주도해온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의장으로 국민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는 임 비서실장은 지금까지 강력한 팬덤을 몰고 다닌다.
1989년 당시 ‘임수경 방북 사건’을 주도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임 실장은 수려한 외모와 유창한 언변, 신출귀몰한 도피 행보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임길동’이라는 별명도 이때 생겼다. 당시 아이돌급 인기로 여학생들이 벽에 붙은 수배 전단지를 모조리 뜯어가고, 그의 사진을 코팅한 책받침까지 제작돼 시중에 판매될 정도였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1993년까지 3년 6개월 옥살이를 했다. 1992년 원주교도소 복역 당시 여자 후배 한 명이 어느 날 편지를 보내왔고 1년 여 서신 왕래를 하다 출소 후 첫 대면을 하게 된다. 부인 김소희씨와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두 사람은 종로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소박한 데이트를 하며 우정을 키워오다 1996년 결혼에 골인했고 이듬 해 보물 1호인 딸 동아를 얻었다.
임 실장은 소문난 딸 바보다. 그의 SNS 프로필 사진은 죄다 딸과 찍은 컷으로 도배돼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당시 본회의장에서 벌어진 몸싸움으로 옷이 찢기고 허리띠가 날아가는 와중에서도 8살 딸이 결혼기념일 선물로 준 커플링을 잃어버릴까봐 바지주머니에 고이 모셔뒀었다고. 그런 소중한 딸 얼굴도 요즘엔 제대로 못 본다.
그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에 ‘젊은 피’로 영입돼 그해 16대 총선에서 34세의 최연소 의원(서울 성동을)으로 당선됐다. 임 실장은 국회의원 시절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만 6년을 활동하며 외교 분야에서도 나름의 전문성을 인정받았고, 개성공단 지원법을 제정하는 등 남북관계와 평화경제에 대한 관심과 철학을 갖고 있다.
북한이 ICBM급 미사일 발사 성공을 주장하면서 동북아 안보 지형은 순식간에 급변하고 있다.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대북정책 기조로 삼았던 문재인정부가 출범 후 험난한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문 대통령의 고심이 깊다. 뫼비우스 띠처럼 꼬여버린 남북관계를 풀어낼 지혜와 돌파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청와대 관계자는 “미중과 고차방정식의 해법을 풀어야 할 문 대통령에게 임 실장은 외교적 난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상대”라고 평가했다.
임 실장은 자신이 왜 정치를 하는지 묻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슴 뛰게 하고 싶은 일이 없으면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가슴 뛰게 하고 싶은 일은 한반도 평화와 공동번영”이라고 했다. 바로 청년들과 함께 한반도 남쪽을 벗어나 유라시아를 개척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이제 그는 국정의 중심에 서 있다. ‘사람 사는 세상과 평화로운 한반도’를 바라는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