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당한 말년. 그는 숱한 사연을 안고 군함도로 끌려가지만 약한 소리 한 번 하는 법이 없다. 남자들도 겁내는 칠성(소지섭 분)에게 맞서고, 겁에 질린 소녀들 앞에 서는 단단한 사람. 말년은 괴롭고 두려운 상황 속, 무거운 책임감을 진 채 소녀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일본과 끝까지 맞선다.
지난 26일 개봉한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는 1945년 일제 강점기, 일본 군함도에 강제 징용된 후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번 작품에서 배우 이정현(37)은 강인한 여성 말년을 연기해냈다.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어요. 현재 생존해 계신 피해자들도 있으니 연기할 때 항상 걱정이 앞섰죠. 긴장감도 컸고요. 연기하는 내내 그 생각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류승완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컸어요. 위안부 피해자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슬픈 캐릭터가 아니었거든요. 감독님이 워낙 강한 걸 좋아하셔서 여배우들도 강하게 그리시는데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어요. 일본에 당당하게 맞서고 같이 끌려온 소녀들의 엄마 같은 역할을 하는 말년에게 끌렸죠.”
류 감독은 말년 캐릭터를 위해 “차진 욕을 선보일 것”을 주문했다. 작은 키와 깡마른 몸을 가진 그이지만 더욱 단단하고 질긴 성격을 보여주고 싶었던 터였다.
“사실 말년이는 서울말을 쓰는 캐릭터였어요. 그런데 표현에 있어서 제가 예쁘게만 표현할까 봐 걱정이 되더라고요. 강인하게 보이기 위해 사투리를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도 좋아해 주셨고요. 그런데 웬걸. 사투리가 너무 힘든 거예요! 하하하. 사투리와 차진 욕을 소화해야 하는데 생각만큼 잘 안 되더라고요. 욕 선생님까지 따로 계셨다니까요. 앞으로는 사투리 연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엄청 시달렸어요. 감독님께서 완벽주의자거든요.”
영화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감성팔이, 국뽕”을 경계하려는 류승완 감독의 태도가 곳곳에 묻어있다. 그는 다양한 캐릭터와 다각적 시선을 통해 이분법적 사고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제가 마음에 든 것도 바로 그런 지점이었어요. 불편한 진실일 수 있지만 사실이거든요. 나쁘기만 한 일본인도, 착하기만 한 한국인도 없었어요. 이건 위안부 피해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깨달은 점이에요. 양국 편을 갈라서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불편한 진실이라도 알려주고자 하는 그 메시지가 좋았어요.”
이정현이 언급한 불편한 진실은 말년과 칠성의 대화에 잘 묘사돼있다. 칠성은 유곽에서 폭행을 당하던 말년을 구하고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며 “같은 조선인끼리 마음을 터놓고 지내자”고 말한다. 하지만 말년은 자신을 “팔아넘긴 것도, 속인 것도 다 조선인이었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펑펑 울었어요. 유곽신의 대사가 너무 슬프고 잔인하더라고요. 리딩할 땐 감정을 담아서 슬프게 연기했었는데 어떤 다큐멘터리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류 감독님이 보내준 다큐멘터리였는데 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담담하니 남의 일처럼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슬픈 거예요. 저런 게 사실적 접근이 아닐까 생각했죠.”
위안부 피해자 역할에 대한 조심스러움 그리고 책임감은 여러 방면으로 드러났다. 체중 감량 역시 그 노력 중 일부였다. 그는 “위안부 다큐멘터리를 보고 먹지도 못하고 수난을 겪는 이들을 보고” 바짝 마른 몸을 가진 말년을 떠올렸다.
“사실 류 감독님이 제게 주문한 건 아니지만 신체검사 신이나 유곽에서 노출신이 있기 때문에 그 장면에서 갈비뼈가 드러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감독님이 너무 좋아하셨고 또 미안해하셨죠. 그런데 막상 살을 빼려고 하니 막막하더라고요. 그렇게까지 빼본 적이 없었거든요. 잘 빠지지도 않더라고요…. 하지만 주·조연 배우들까지 체중 감량에 동참했고 함께 고생하면서 촬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살이 빠지게 됐어요.”
말년이라는 캐릭터의 근간은 강인이다. 이는 그의 첫 등장으로 대변되는데 아무도 맞서지 못했던 칠성을 단번에 제압하면서 치명적 상처(?)를 선물하기도 했다. 배 안에서 싸움을 벌이는 칠성의 사타구니를 꽉 쥐며 기를 꺾어놓은 것이다.
“첫 등장이요? 어휴, 너무 부담됐죠. 지섭 오빠와 처음 만나서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바로 그 신을 찍은 거예요! 얼마나 서로 부담이었겠어요. 하하하. 배경이 배다 보니까 흔들리기도 하고 한두 번 만에 OK 컷을 받아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거기다 감독님은 제 속도 모르고 ‘말년! 더 세게 잡아!’ 하고 외치시더라고요. 너무 민망하고 죄송스러웠죠. 그래도 한 번에 OK를 받아내서 다행이었어요. 여러 번 갔다면 서로 민망했을 거예요.”
놀랍게도 말년과 칠성은 그런 강렬한 첫 만남을 뒤로한 채 묵묵히 서로를 챙겨주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원수처럼 만났지만,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한 것이다. 이정현은 말년과 칠성의 사이를 두고 “동지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정의했다.
작품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주연 배우들을 비롯해 조·단역 배우들까지 어떤 사명감에 사로잡혀있었다. 이정현은 치열했던 그 날을 떠올리며 “내내 행복했다”고 털어놨다.
“좋은 감독님과 스태프 그리고 이런 작품 안에서 흠뻑 취할 수 있었다는 게 큰 영광이었죠. 너무 힘든 촬영이었지만 현장이 너무 좋았어요. 매일 촬영이 끝나고 나면 몸에 멍이 들어있는데 오히려 상처를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어요. ‘그래도 하나 해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그 정도로 책임감이 컸던 것 같아요. 아주 작은 비중을 가진 단역 배우들도 체중 감량이며 온몸을 내던지는 액션 연기를 선보였어요. 모두가 책임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죠. 그 안에 파묻혀 말년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행복이었어요.”
‘꽃잎’(1996)을 시작으로 ‘하피’(2000), ‘파란만장’(2010), ‘명량’(2014),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군함도’(2017)에 이르기까지. 이정현은 작은 체구에서 괴물 같은 에너지를 끌어올렸고 매번 다른 이미지들을 변주해왔다. 그는 지난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며 “영화 ‘꽃잎’과 ‘파란만장’,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큰 애착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세 작품이 특별한 건 연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꽃잎’이 아니었다면 저는 배우를 시작할 수 없었을 거고, ‘파란만장’의 경우에는 배우 인생에 터닝포인트를 마련해주었죠. 또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영화에 대한 열정을 끌어올려 줬어요. 그리고 이 작품 덕분에 ‘군함도 합류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들 연결고리가 있고 이 세 작품이 가장 큰 역할을 해준 것 같아서 (애정이) 남달라요.”
1996년 스크린 데뷔 후 2017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정현은 늘 같은 마음으로 작품을 대해왔다. 영화, 동료,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20대는 정말 힘들었어요. 여유도 없고 힘들기만 했죠. 30대가 되고 여유를 되찾으면서 자연스럽게 터닝 포인트를 맞았어요. 좋아하는 캐릭터, 영화를 연기할 수 있게 됐거든요. 큰 축복이고 행복이죠. 역할을 결정하고 나면 늘 책임감 있게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