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9] 왕소군(王昭君)은 불행한 여인이었나? ③

2017-07-30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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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흉노에게 시집간 왕소군에게는 영호(榮呼) 연씨라는 존호가 부여됐다.
즉 ‘흉 노를 편안하게 하는 왕비’라는 의미였다.

선우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우는 등 흉노에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궁궐에 갇혀 지냈던 소군은 자유로운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호한야 선우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에게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노령의 호한야(呼韓倻)선우는 마치 어린 아이와 생명을 바꾼 듯 2년 만에 죽었다.

그리고 그 선우의 자리는 그의 친아들인 복주루약제(復株累若堤)선우가 즉위했다.
흉노를 포함한 유목사회 풍습 가운데는 수혼제(嫂婚制;levirate)라는 것이 있다.

아버지의 뒤를 잇는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아버지의 첩들을 자신의 아내로 삼는 풍습이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부인으로 받아들이는 형사취수(兄死娶嫂)도 여기에 해당한다.

새로 즉위한 선우가 계모인 자신을 아내로 삼으려 하자 왕소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했다.
중국에는 그 같은 풍습이 없다는 것이 그녀가 내세운 이유였다.

결국 왕소군은 한나라 황제에게 물어 보고 결정하겠다며 황제에게 사신을 보냈다.
황제가 보낸 답변은 흉노의 풍습에 따르라는 것이었다.
 

[사진 = 몽골 신부행렬(민화)]

그렇게 해서 소군은 젊은 선우의 아내가 됐다.
그리고 두 딸을 낳았다. 큰 딸은 수복거차(須卜居次), 둘째 딸은 당간거차(當干居次)라 불렀다.

복주루약제 선우는 재위 10년 만에 사망했다.
그 이후 오주류약제 (烏珠留若鞮) 선우를 비롯한 세 명의 동생이 잇따라 선우에 자리에 오른다.

오주류약제 선우가 즉위했을 때 왕소군의 나이는 40세가 조금 넘은 나이였는데 그녀가 수혼제에 따라 동생 3명과 부부관계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흉노의 풍습으로 당연한 일이어서 사서(史書)에 실리지 않은 지도 모른다.

다만 오주류약제 선우시절 국정을 장악했던 당(當)이라는 인물이 왕소군의 큰 딸 수복거차의 남편, 즉 왕소군의 큰 사위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왕소군은 72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한 셈이다.

▶ 과연 비운의 여인인가?
흉노에서 살았던 소군을 중국에서는 애처롭게 생각하고 비운의 여인이라고 불렀다.
중국이 가진 윤리의 잣대로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혼인 생활을 하고 척박한 오랑캐 땅에서 살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젊고 예쁜 여인이 늙은 선우를 거쳐 젊은 선우를 남편으로 삼은 것이 과연 비운인지 쉽게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닌 것 같다.
 

[사진 = 몽골의 초원]

또 장강 유역의 호북성 출신인 그녀가 추운 초원의 땅에서 지내면서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해서 가엽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딸을 낳아 얼굴이 예쁘면 흉노로 보내질 것을 두려워해 일부러 얼굴을 망가뜨리기도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왕소군은 흉노와 화친을 이룬 공으로 그의 형제들은 한나라에서 높은 관직을 받고 사신으로 흉노를 여러 번 다녀갔다.
또 두 딸은 한나라 황실을 자주 다녀가기도 했다.

흉노의 땅에 살면서 연씨, 즉 왕후로서 보람 있는 삶을 산 그녀가 과연 수많은 후궁 가운데 한사람으로서 황제의 부름을 기다리고 살면서 이름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여인의 신세보다 더 가엽고 불행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몽한 화친의 상징 인물로 부활
그렇게 일생을 살고 흉노의 땅에서 묻힌 왕소군, 그 땅이 지금은 중국의 땅이 되면서 그녀는 한족과 이민족간의 화친의 상징으로 이용되고 있다.
내몽골자치구 4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선우와 함께 말을 타고 있는 그녀의 동상에는 그래서 화친(和親)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50여 개의 소수민족을 가지고 있는 중국은 그 소수민족을 어떻게 끌어안아 중화시키느냐하는 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 해묵은 숙제다.
그런 점에서 왕소군은 홍보가치로 충분하다.

1979년도에 적은 "몽한단결 우의영원(蒙漢團結 友誼永遠)" 이라는 글귀나 1963년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 동필무(董必武)가 이곳을 방문해 남긴 글이 그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소용없는 일, 소군은 식견이 넓은 여인으로 중국과 이민족 사이에 화친의 인식을 높이는데 큰 몫을 했다."

동필무가 지적한 대로 과거에도 지금도 왕소군은 중국인들에게는 고마운 인물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홀로 청총에 누워 황혼을 맞으리"
왕소군의 묘소를 청총(靑冢)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연유에 대해 가을이 되면 소군의 묘지 바깥쪽의 풀들은 누렇게 변하는 데 묘 안의 풀들은 여전히 푸른빛이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있다.
당시 흉노의 본거지는 거친 황무지가 아니라 녹색의 융단이 깔린 것과 같은 양질의 초원지대였지만 가을이 되면 누른빛을 띠는 어디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도 여름이면 소군의 묘 주변뿐 아니라 근처의 초원 모두가 푸른빛을 띠고 있고 묘소 안에는 장미와 맨드라미, 해바라기 등 여러 가지 꽃들이 소군의 화신인 양 아름답게 어울려 있다.

그런데도 주변의 땅을 거친 황무지로 표현한 것은 중국인들의 이민족에 대한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한족인 소군의 무덤에는 푸른 풀이 자라는데 그녀가 살았던 환경은 거친 흉노의 땅이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시성 두보가 소군의 묘에 들러 지은 한 수의 시에서도 그러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한번 자대(紫帶;황제의 거소)를 떠나면 적막이 계속되고
홀로 청총에 누어 황혼을 맞으리."

비록 가묘이긴 하지만 왕소군의 묘가 중요한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은 한족과 이민족간의 화친이라는 현세에서도 필요한 정치적인 이유가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녀의 묘는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을 위한 묘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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