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배군득 기자 = ‘인생은 세옹지마.’
인생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어 변화가 많다는 의미의 사자성어다. 김용진 기획재정부 2차관은 이 사자성어를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는 인물이다.
김 차관은 1961년생으로, 행시 30회로 공직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공직생활은 비교적 순탄하게 시작됐다. 기획예산처 복지노동예산과장, 예산기준과장에 오르며 이른바 ‘예산실 성골’ 출신답게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순탄할 것 같던 공직생활은 공공혁신기획팀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꼬이기 시작했다. 2008년 공공혁신기획팀으로 옮긴 후 2014년 사회예산심의관으로 예산실에 다시 오기까지 무려 6년이 걸렸다.
김 차관은 예산실 복귀 이전에 혁신인사과장, 장관 비서실장, 대외경제국장, 주 영국대사관 재정경제금융관, 공공혁신기획관 등 다양한 곳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대부분 공무원이 좀처럼 부서를 바꾸지 않는다는 관행을 볼 때, 김 차관의 다양한 경력은 공직에서 승진의 아킬레스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승진과 거리가 멀어진 그는 마지막 승진기회를 잡기 위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2013년 기획재정부 대변인으로 자청하고 나섰다.
초기 언론 스킨십이 부족해 고생하던 현오석 경제부총리를 대신해 언론 친화적 대변인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이로 인해 다시 예산실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힘들게 예산실에 복귀했지만, 쟁쟁한 후배들이 일찌감치 앞자리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더 이상 승진할 가능성도 희박했다.
결국 사회예산심의관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과감하게 공직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인 2015년 6월 대통령직속 지역발전위원회(지발위) 지역발전기획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이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과감한 공직생활 마감은 ‘인생 2막’의 신호탄이 됐다. 대부분 공직에서 물러나면 현실에 안주했지만, 김 차관은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을 타진하며 재기를 노렸다.
짧은 지발위 생활을 마감하고 2016년 1월 동서발전 사장으로 취임한 것도 그의 다양한 능력이 빛을 본 사례로 꼽힌다. 동서발전 사장으로 역임하며 지역언론과의 유대관계도 돈독해졌다.
그에게 기획재정부 2차관은 새로운 도전이다. 기재부 2차관은 예산실 엘리트 코스이자 ‘예산실의 꽃’으로 불린다. 수많은 예산실 직원의 마지막 피날레로 불린다. 그만큼 기재부 2차관은 예산실 성골 출신의 출세길로 여겨진다.
기재부 2차관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산실을 거쳐야 한다. 예산과 세제를 아우르는 자리인 만큼, 예산을 모르면 업무 수행하기 어려운 자리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 차관은 그간 쌓은 다양한 경력과 노하우를 접목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다. 기존의 틀에 박힌 예산수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각에서 예산 수립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정무감각도 뛰어나 국회에서 예산 통과에도 강점이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김용진 2차관은 조직사회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안다. 예산과 세제가 새 정부에서 상당히 중요한 만큼, 김 차관 임명은 이를 대변한 인사”라며 “그간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2차관 자리가 그의 새로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