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본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시각을 가진 동물을 살펴봐야 한다. 시각을 가진 동물은 대략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등이 해당한다. 이들의 눈은 자신의 신체와 환경에 맞도록 발달해 있다.
눈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어떤 기준을 적용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잘 보이는 눈’과 ‘잘 보는 눈’이다. 잘 보이는 눈을 먼저 생각해 보자. 잘 보이는 눈은 시력이 좋기도 해야겠지만 보이는 각도가 커야 한다. 보이는 각도가 170도 정도라면 뒤에서 다가오는 포식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런 눈을 가졌다면 누군가의 먹잇감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잘 보이는 눈이 필요한 동물은 머리의 양쪽에 눈이 위치하게 된다. 최대한 보이는 각도가 넓어야 뒤쪽이나 측면에서 다가오는 포식자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종류의 눈은 어떤 동물들이 갖고 있을까? 앵무새의 눈과 올빼미의 눈을 생각해 보자. 앵무새는 잘 보이는 눈을 가졌다. 반면에 올빼미의 눈은 잘 보는 눈이다. 앵무새의 눈은 머리의 양옆에 위치해서 전면을 중심으로 되도록 넓게 보이도록 자리하고 있다. 올빼미의 눈은 머리의 양옆이 아닌 평평한 얼굴의 전면에 두 눈이 위치해서 보고자 하는 대상을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개구리, 황소, 앵무새, 들쥐, 심지어는 덩치 큰 들소의 눈조차도 머리의 양쪽에 위치한다. 이들의 눈은 포식자가 다가오는 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채야 하고 항상 경계할 수 있도록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다. 반면 올빼미, 사자, 호랑이, 독수리의 눈은 어떠한가? 이들의 눈은 먹잇감을 응시하고 추적하는 데 유리하게 앞쪽에 위치한다. 이들의 눈은 뒤나 옆을 볼 필요가 별로 없다. 뒤가 보고 싶으면 그냥 천천히 돌아보면 된다. 포식자가 잡아먹힐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의 눈은 어떨까? 놀랍지 않은가? 그렇게 사랑이 넘치는(?) 인간이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하는 일을 돌아보면 포식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도 없다. 눈만으로도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으니 섬뜩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인간이 포식자라고 하더라도 먹잇감을 응시하는데 시각을 전부 활용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 시각은 목적을 갖고 보는 데 의미가 있다. 목적을 갖고 보는 것은 그냥 잘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그저 ‘보이는’ 것에는 의도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은 정말 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지갑에 든 조그만 동전 하나를 찾지 못해 쩔쩔매거나, 몇 벌 걸려있지도 않은 옷장에서 옷 하나를 찾지 못해 투덜거리던 자신을 발견한 적은 없는가? 어쩌면 우리가 ‘보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며, 뇌에 어떤 색다른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는 얘기다. 포식자인 인간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동물처럼 그저 잘 ‘보이는’ 것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틀린 글자 하나를 순식간에 찾아내는 윗사람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귀신처럼 이걸 어떻게 찾아낼까?’ 하지만 이건 윗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틀린 글자를 만들어 놓고, 자신이 만든 틀린 글자를 발견하지 못하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본인의 문제다. 놀라운 생각의 출발은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당신들은 보고 있어도 보고 있지 않다. 그저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은 놀라운 속성을 찾아라.” -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