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배정치의 시대' 제임스 퍼거슨 지음 | 조문영 옮김 | 여문책 펴냄
국가가 저소득층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사회복지 프로그램. 이게 가능할까? 실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의 30%는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다. 국내 일부 지자체의 청년·저소득층 현금 지원을 뜨악하게 바라보다못해 법률까지 동원해 국가가 막으려 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더더욱 생소한 이야기일 듯하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저명한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은 30여 년 동안 남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현지조사와 이론작업을 바탕으로 빈곤, 개발, 이주, 현대성 등에 관한 논의에 크게 기여해 왔다. 그의 책 제목인 '분배정치의 시대'는 그래서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복지국가의 신자유주의적 종언을 선언하는 이때, 남아공 국민들이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자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대량실업의 국면에서 빈곤을 감소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야말로 동시대 자본주의를 재고하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형태를 모색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본소득 등 직접적 현금지급에 대한 요구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있다는 것이다.
남아공을 집중적으로 살피는 저자는 "정규직 임금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유럽형 복지모델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이제야말로 유럽형 복지국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버려야 할 때"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일부 유럽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확산으로 복지국가의 기반 자체가 허물어지고 있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남아공 같은 나라들의 실험은 우리가 개척해 나가야 할 미래의 전망을 그려볼 수 있게 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사회적 보호 최저선'이라는 국제적 캠페인을 벌인 바 있다. 이 캠페인은 '누구도 일정한 소득 기준 이하로 생활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은 적어도 기본적인 사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달리 말하면, 현금은 물만큼 생사의 문제를 결정짓는 소중한 자원이기에 기본소득 등의 현금지급 프로그램을 의무교육, 무상급식 같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복지는 '물고기 잡는 법'이 아니라 그냥 물고기를 주는, 매우 단순한 장치일지 모른다.
400쪽 | 2만원
◆ '돈을 찍는 자' 쉬진 지음 | 권하정 옮김 | 내인생의책 펴냄
"위기가 도래할 때마다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은 경제 주기에 따라 위기는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시장에는 자체 필터링이 있으며, 파산하는 금융 기관은 바로 이 과정에서 걸러진다고 믿는다. (중략)장기적 시각에서 본다면, 정부가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면 모두가 공멸하고 만다."(본문 229쪽)
지난해 12월 15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인상 소식은 대한민국을 통째로 흔들었다. 환율은 하락했고 주식시장은 출렁였으며, 부동산 시장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부당국은 물론이고 경제학자, 시민운동가 등은 미국발 '악재'를 걱정하며 한국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대책을 쏟아놓았다.
전문가 대부분은 미국의 금리인상을 '세계의 긴축 시대 진입'으로 분석하며 앞으로 늘어날 국가 간 자금이동에 따른 유불리를 따지느라 분주하다. 수출 위주 성장 전략으로 해외 자금 흐름에 민감한 한국 경제는 이를 악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미국과의 금리 차이에 따른 자본 유출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심지어 이러한 악재들이 이른바 '퍼펙트스톰'으로 이어져 1997년과 2008년에 이어 또 다시 금융위기가 찾아올 거라는 예상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중국의 젊은 경제학자 쉬진은 "언제쯤 금융위기가 발생할지에 대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모든 복잡한 일의 시작은 대부분 단순한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경제의 본질은 돈이며, 돈의 유동과 정체에 따라 경제 상황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 경제는 이미 '하나가 망하면 다함께 망하고, 하나가 흥하면 남은 곳도 함께 흥하는' 공생공사의 길에 들어섰다.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금융이며, 금융을 움직이는 곳은 결국 은행이다. 그리고 은행의 동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각국의 중앙은행과 중앙은행가들, 이른바 '돈을 찍는 자'들이다.
최초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부터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국은행까지 그 본질은 정부 기관이 아닌 하나의 '민간은행'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의 눈에 비친 중앙은행가들은 경제위기를 막아내는 '히어로'면서 동시에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검은 손'의 이미지다. 저자는 "돈을 휘두를 수 있는 저울추가 민간으로 넘어간 순간, 왕권을 위한 기관이던 중앙은행은 시민 혁명의 든든한 뒷배가 되는 기관으로 탈바꿈한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않더라도, 300년간 금융과 권력을 무대 삼아 활동해 온 중앙은행과 은행가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504쪽 | 2만2000원
◆ '촘스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노엄 촘스키 지음 | 구미화 옮김 | 와이즈베리 펴냄
현대 언어학과 인지과학의 창시자이자 열렬한 사회 비평가인 노엄 촘스키의 인간과 사회에 관한 철학서가 나왔다.
촘스키는 이 책에서 처음 변형생성문법 이론을 정립했던 1950년대 이후 거둔 인지과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언어 연구가 어떻게 과학적으로 발전했는지를 설명하고, 언어의 사회적 측면과 의사소통, 지시와 관련된 측면을 강조하는 여러 이론을 비평한다. 또 관심을 사회와 정치로 옮겨 그가 '자유 사회주의'라고 설명하는 입장을 면밀히 탐구하며 철학적으로 옹호한다.
저자가 인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는 질문은 '언어란 무엇인가?'이다. 최소한 암묵적으로라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언어에 관한 여러 가지 심각한 질문을 파고드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를 철학자나 인류학자처럼 의사소통과 연결시켜 범위를 한정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언어가 인간에 의해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 재능의 일부이기 때문에 과학적이든 철학적이든 언어를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면, 접근 방법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촘스키는 인간이 쉽게 정리해서 표현할 수 있는 질문을 '문제'라고 하고, 우리의 인지능력을 벗어나는 의문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쉬운 문제 형태로 공식화시키지 못할 때 이런 것을 '미스터리'로 부른다. 그는 "짐승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식 대부분이 자연의 신성한 손끝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타고난 본능"이라고 주장한 흄의 생각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인지능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설명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그는 "현대 국가들이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공공선이라는 최고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고집한다"고 비판하며 공공선이 얼마나 역설적으로 보편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공공선에 대한 관심을 통해 교육 제도부터 노동 여건에 이르기까지 풍요로운 다양성 안에서 이해력을 발휘하고 인간적으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명한 언어학자가 과학적 연구의 폭넓은 함의에 대해 평생에 걸쳐 고민한 내용을 단번에 이해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가 인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단초는 얻을 수 있다.
248쪽 | 1만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