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유엔(UN) 소총회(小總會)가 ‘전 조선에 선거를 실시하도록 추진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선거가 가능한 지역 내에서 성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미국의 제안을 31대 2(기권 11)로 가결한 것은 1948년 2월 26일의 일이다. 그 결의에 따르면 인구 비례에 따라 남안에서 의석(議席)의 3분의 2를, 그리고 북한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점령중인 소련이 이 선거를 거부하고 나섬으로써 결국 선거는 남한에서만 실시되고, 거기서 탄생되는 정부는 단독정부일 수밖에 없었다. 메논(K. P. S. Menon) 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의장은 선거 날짜를 1948년 5월 첫주 이내로 못 박았고 그에 따라 존 하지(John Reed Hodge) 장군은 3월 1일 특별성명을 통해 5월 9일로 선거일을 결정 발표하였다.
이 선거법은 다름아닌 입법의원(立法議院)에서 제정했던 것으로 입법의원은 하곡수집법(夏穀收集法, 1946년 미군정이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실시한 미곡 수집 정책)이니 공창제도(公娼制度) 폐지령 등 10여건의 법령을 제정하는 가운데 이 선거법도 통과시켰으며 실질적으로는 선거법 제정이 입법의원 개원의 가장 주된 목적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후 5월 9일로 발표되었던 선거일은 하루를 연기한 5월 10일로 변경되었는데, 그 이유는 9일 오전에 20분 동안 일식(日蝕)이 있었기 때문이다. 5·10 선거가 끝난 1948년 5월 19일 입법의원은 자동 해산되었지만, 선거일까지 나라 안이 평온했던 것은 아니었다. 4월 3일에 일어난 제주도 무장공비 폭동과 남북협상 등으로 UNTCOK 내부에서까지 보조가 맞지 않아 세간에는 여러 가지 낭설과 잡음이 번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련의 사태를 주시해 온 목당(牧堂) 이활(李活). 입법의원으로 참여했던 그이고 보면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 선거에 당연히 출마함직했음에도 그는 그것을 포기했다. 그가 출마를 포기하게 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말해주는 증언은 없지만, 몇 달 전 독립을 눈앞에 두고 흉탄에 쓰러진 존경하고 아끼던 동지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의 죽음을 본 데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출마 포기가 결정적으로 그를 자극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인촌은 조만식(曺晩植) 동지가 위원장으로 있는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 이윤영(李允榮) 동지를 국회에 진출토록 하기 위해 종로 갑(甲)구에 그를 출마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흉탄에 희생되었고 또 한 사람은 정당의 당수이면서 극력 출마를 종용하는 당 간부(黨 幹部)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출마를 포기하고 있는 전후 사정을 목당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목당은 평소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정치에 관심이 없음을 비쳐 왔었다.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상산도 이런 목당의 그런 심정을 헤아려, 자신의 출마로 무협(貿協) 회장직을 내놓으면서 후임자로 목당을 천거했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회원들 역시 그간의 목당의 처신을 보아 온데다 사심없는 대범한 그의 인품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회장 추대는 아무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되어 목당으로선 제헌국회의원직 대신에 무협 회장직을 택한 결과가 되었는데, 임시총회는 2대 회장으로 목당을 선출하고 그리고 강성태(姜聲邰)를 전무이사로 부회장에 주요한(朱耀翰)·박병교(朴炳敎)와 김지태(金智泰)를 유임시킴으로써 회장만이 교체되는 총회가 된 셈이었다. 그리고 상산은 선거에서 무난히 당선되어 초대 재무부장관이 되었다. 상산은 재무부장관이 되면서 무협의 강성태 전무를 세관국장(稅關局長)으로 발탁하여 무협은 1948년 11월 16일 또다시 제2차 임시총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여기서 확정된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회장 이활(李活)
전무이사 나익진(羅翼鎭)
부회장 김익균(金益均, 건설실업)
박병교(朴炳敎, 화신무역)
김지태(金智泰, 부산지부장)
이활·나익진 팀이 실현되고 업계의 신예 김익균이 부회장에 당선되어 협회는 김익균과 나익진의 젊은 세대가 이끄는 신풍(新風)을 조성했으며, 이들의 야심은 곧 조사부의 강화로 나타났다. 즉 조사부 진용을 부장 고승제(高承濟), 과장(편집장) 안림(安霖), 기자(記者) 신대철(申大澈)·이승보(李承輔)로 구성하고 통신철(通信綴) 형태의 입주간통신(入週刊通信) 발행을 시도하고 나섰다.
그동안 나익진 조사부장은 은행 조사부 요원들의 협조를 얻어가면서 기관지 월간(月刊) ‘무역(貿易)’의 창간호를 1946년 12월에 발간한 뒤 격월로 발행을 꾀했으나 제2호를 1947년 2월에 내고는 재정난으로 중단 상태에 있었던 것인데, 우선 이를 속간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조사팀은 3, 4호를 낸 다음 12월에는 앞에 말한 통신철 형태의 주간통신으로 바뀌어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뒤에 일간(日刊) ‘무역통신(貿易通信)’의 모체가 된 이 주간물이 일간 ‘무역통신’으로 창간을 본 것은 바로 그 이듬해인 1949년 8월 16일에 가서였다.
뿐만 아니라 몇 안되는 조사부 팀에 의하여 1949년 12월 1일자로는 최초의 ‘무역연감(貿易年鑑)’ 제1호까지 발행되었으니, 그들의 의욕과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