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선거 당선인은 1956년 대만 타이베이(台北)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가는 대만 최남단 핑둥(屏東)현다. 핑둥현이 차이잉원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는 이번 대선 마지막 전국유세의 출발지를 핑둥현의 한 도교사원으로 잡았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푸젠(福建)성 객가(客家)의 후예이며, 그의 할머니는 산악지대에 거주하던 대만 원주민 파이완(排灣)족이다. 객가인과 대만 원주민의 혈통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의 아버지 차이제성(蔡潔生)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대만에서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려 성공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부동산과 건설업, 호텔사업으로 사업을 확장시켰다. 차이잉원은 11남매 가운데 막내딸이다. 차이잉원의 어머니인 장진펑(張金鳳)은 차이제성의 5명 첩실 중 한명이다.
◆첩실의 딸, 반항심에 가출 결행키도
첩실의 딸인 차이잉원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미워했으며, 아버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출을 결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의 생활을 세심하게 돌보고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편견을 서서히 거둬들였다. 아버지의 격려속에 차이잉원은 학업에 매진했고, 1974년 명문 대만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해 대만대 법대 1등 졸업생은 천수이벤(陳水扁) 전 총통이었다.
유복했던 차이잉원은 1978년 대학 졸업후 미국 코넬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이 곳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그는 1980년 그는 런던정치경제학원(LSE)으로 진학해 경제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졸업후 대만에 돌아온 그는 둥우(東吳)대학에서 첫 교편을 잡았다. 당시 대만은 여러 국제기구 가입을 추진중이었다.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했으며, 법과 경제를 전공한 그는 대만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인재였다.
그는 ‘학술 전문가’ 신분으로 대만 행정원 경제부 국제무역국의 고문을 겸임했다. 또 홍콩마카오조례의 초안을 잡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대만이 관세무역협정(GATT)와 세계무역조직(WTO)에 가입하는 과정에서 교섭대표단으로도 활동했다. 학자 차이잉원이 대만의 국제조약체결 방면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던 시기였다.
◆리덩후이 양국론 작성 참여
1994년 차이잉원은 행정원 대륙사무위원회의 자문위원에 위촉되면서 양안관계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1999년에는 국가안전회의의 자문 위원으로 위촉됐다. 이 조직들에서 그는 양안관계를 연구했으며,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의 양안 정책에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리덩후이 이전에 대만을 다스렸던 장제스(蔣介石), 장징궈(蔣經國) 부자와 달리, 리덩후이는 대만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또한 리덩후이는 일제강점기에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대만독립을 꿈꾸기 시작했으며, 국민당 출신이면서도 국민당 독주를 막기 위해 총통직선제를 도입했다. 동시에 대만독립을 선호하는 인물들을 발탁해 정치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차이잉원 역시 이 같은 배경으로 정부 자문위원에 발탁된 케이스다. 1999년 차이잉원은 국가안전회의에서 대만독립을 핵심으로 하는 ‘양국론’ 작성작업에 참여했다.
2000년 대만독립을 지향하는 민진당의 천수이볜이 총통에 당선됐다. 양국론 작성에 참여했던 차이잉원의 재능을 아낀 천수이볜은 당시 대만 국립정치대 법대교수이던 차이잉원을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으로 파격 발탁했다. 총통취임 직후 천수이볜은 대만독립을 선포하지 않고, 국호를 변경하지 않으며, 리덩후이의 양국론을 헌법에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1992년 컨센서스(92공식)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냈다. 92공식은 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그 의미는 중국과 대만 각자의 해석에 맡긴다(一個中國, 各自表述)'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대만 독립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컨센서스다.
◆일변일국론 개념 만들어내
하지만 대륙위원회 주임위원 신분의 차이잉원은 “한개의 중국이라는 용어는 회담 과정에서 나온 표현일 뿐 천수이볜 총통은 ‘한 개 중국’이라는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내며 대만독립의 불씨를 살렸다. 이후 차이잉원은 일변일국론(一邊一國論)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일변일국론은 중국과 대륙은 별개의 독립된 국가라는 게 핵심이다. 대만독립론의 핵심인 양국론과 일변일국론이 모두 차이잉원의 손을 거쳐 만들어 진 것. 천수이볜 집권1기 4년동안은 차이잉원이 대만독립의 논리와 비전을 명확하게 하는 시기였다.
천수이볜이 재선에 성공했던 2004년 차이잉원은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을 사직한 후 정식으로 민진당에 입당해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한다. 그해 총선에서 민진당의 비례대표 순위 6번으로 입법위원(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어 2006년에는 행정부 부원장(부총리)으로 올라서며 승승장구했다.
2008년 대선에서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며 민진당 정권이 막을 내렸다. 만신창이가 된 민진당은 새로운 리더십을 필요로 했다. 기존 인물들이 민진당 주석직을 모두 고사한 끝에, 주석직은 정치신인이지만 국민의 신망이 높은 차이잉원에게 돌아갔다. 그는 주석취임 후 3년간 각종 선거에서 집권 국민당에 7차례나 승리하며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소신과 결단력, 소통능력은 대만 국민들의 마음을 샀다.
◆대권 재수끝에 대승거둬
그는 2012년 대선에서 민진당 후보로 나섰지만, 마잉주 국민당 후보에게 80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민진당 주석직에서 물러났던 그는 2014년 5월 93%가 넘는 당내 경선 지지율을 얻으며 주석으로 복귀했다. 압도적인 당내 지지율을 바탕으로 그는 민진당 대선후보로 낙점받고 대선 재수의 길을 걸었다. 2015년 내내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이며 ‘차이잉원 대세론’을 이어갔다. 주리룬(朱立倫) 국민당 후보가 차이잉원의 양안정책이 모호하며 비현실적이라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지만, 대만 국민의 차이잉원에 대한 지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2016년 1월 대만 총통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이로 국민당 후보를 누르고 총통에 당선됐다.
올해 60세인 차이잉원은 아직 미혼이다. 때문에 동성연애자라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그는 동성결혼에 대한 지지의 뜻을 밝히기도 했지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의혹에 답을 한 적은 없다. 외모가 청아하고 항상 단발 머리인 그는 김용(金庸)의 소설 '신조협려지'에 나오는 소룡녀(小龍女)의 이미지와 비슷해, ‘대만의 소룡녀’라는 별명이 있다. 그동안의 정치생애에서 아무런 부패스캔들을 낳지 않았으며, 어느 상황에서든 냉정을 잃지 않는다는 평을 받는다. 차이잉원은 드라이빙이 취미다. 한번은 타이베이에서 정부 회의가 열리는 핑둥까지 400㎞를 홀로 운전하고 간 적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