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세상보기] 박근혜와 시진핑이 연주하는 변주곡

2015-08-2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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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교 글로벌뉴스본부장

“사람이 떠나면 차(茶)는 식기 마련인데도 어떤 사람은 차를 계속 뜨겁게 만들기 위해 집착하는 건 무슨 까닭인가?”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 10일 이론면(7면) ‘사상종횡’ 코너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반문했다. 제목은 ‘사람이 떠나면 차는 식는다(人走茶凉·인주차량)는 말을 변증법적으로 봐야’였다. ‘인주차량’은 끈 떨어지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소위 염량세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인주차량을 개탄하곤 하지만 이를 변증법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당연한 현상일 뿐이라는 논지다. 그러면서 은퇴한 지도자 중 여전히 ‘남은 권력’을 행사하려는 사람이 있다고 비판했다.

문장은 중국내 거의 모든 언론에 인용 보도됐다. 인터넷에서도 당연히 핫 이슈가 됐다. 동시에 ‘누구를 지목한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됐다. 중국 네티즌들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을 겨냥한 글로 간주하면서 ‘두꺼비’라는 그의 별명을 들먹였다.

지난 20일에는 국영 CCTV 홈페이지 등이 더욱 강한 어조로 개혁 저항 세력을 성토하는 논평을 게재했다. 마침내 24일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는 ‘장쩌민 전격 체포’ 사진이 나돌았다. 점퍼 차림의 장쩌민이 좌우에 선 두 남성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연행되는 장면이다. 합성 사진으로 보이지만 그만큼 시진핑(習近平) 지도부와 장쩌민 세력 간 갈등이 간단치 않다는 방증이다.

최근에는 청나라 때 여름 황궁이었던 이화원 부근 중앙당교 입구에 세워진 장쩌민의 대형 친필 표지석이 철거됐다. 이에 대해 시진핑 주석의 ‘장쩌민 지우기’라는 분석이 나왔다. 지난 12일 발생한 톈진(天津) 대폭발 참사를 놓고는 장쩌민 일파가 저지른 시진핑에 대한 테러공격이라는 유언비어가 인터넷에 퍼지기도 했다.

여기에다 전 세계가 중국 경제를 보는 불안감은 커져가고 있다. 당 지도부에서도 “경제 상황이 심각한 만큼 반부패 활동보다 경제 살리기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형편이다. 시진핑으로선 집권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달 3일 열리는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전’ 70주년 열병식은 시진핑에게는 엄청난 기회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 출범을 전 세계를 향해 알렸던 바로 그 톈안먼(天安門) 성루에 올라 열병식을 참관한다는 건 대단한 상징성을 갖는다. 지금까지 국경절(10월1일) 말고는 열병식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승전 70주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국가 총동원 체제로 최대 규모의 열병식을 개최하는 건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래픽=아주경제 김효곤 기자]

무엇보다 이를 통해 국내 정치적 위상을 다시 한 번 확고히 다질 수 있다. 2012년 당 총서기에 등극한 뒤 지금까지 추진해온 반부패 개혁에 어깃장을 놓는 세력을 압박하는 효과는 상당하다. 중국의 군사굴기를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에 과시하는 것도 계산에 뒀다. 다음달 말 미국 방문을 앞둔 만큼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러한 열병식을 시진핑은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참관하는 건 역사적인 사건이다. 6.25전쟁 때 ‘중공군’으로 우리와 총부리를 겨눴던 인민해방군의 군사 퍼레이드 아닌가. 미국의 핵심 동맹국 중에서 전승절 행사에 참가하는 정상으로는 박 대통령이 유일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에게는 심한 고립감을 안겨줄 게 확실하다.    

시진핑으로선 자칫 빛이 바랠 뻔했던 행사에 박 대통령이 참석해주는 데 대해 고마움을 크게 느낄 게 분명하다. 장밍(張明)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25일 기자회견에서 열병식 참석 외국 정상들을 발표하면서 푸틴에 앞서 맨 먼저 박근혜를 언급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중국 매체가 ‘박근혜 등 국가원수 30명 열병식 참석’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사실도 마찬가지다. 중국으로서도 박 대통령 방중을 위해 상당한 공을 들이긴 했지만. 

박근혜로서는 이번 방중을 계기로 동북아 외교를 주도적으로 펼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박근혜-시진핑 회담에서는 2012년 이후 중단됐던 한·중·일 정상회담 재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요청을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지렛대 역할을 둘러싸고 얼마나 구체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특히 고위급 협상 타결은 남북한이 자체적으로 위기관리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박근혜의 발언권을 강화시켜준 측면이 있다.  

이제 시진핑이 미국을 의식하면서도 베이징행을 선택한 박근혜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보여줘야 할 차례다. 두 지도자간 인간적인 신뢰도 '답례품'의 수위에 영향을 줄 수 있을 터다. 이를 토대로 박근혜는 10월 말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열병식 참가했다고 섭섭해 하지 마라. 베이징 방문은 한반도 평화에 큰 도움이 됐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에도 유익한 것 아니냐."

(아주경제 글로벌뉴스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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