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양성모·윤정훈·한아람 기자 =“지나 치게 현명한 부인은 나 같은 사람한테는 오히려 피곤했을 수도 있다. 일을 하다모면 입조차 떼기 싫을 만큼 피곤한 경우도 왕왕 있는데 현명한 부인이 현명한 나머지 지나치게 내조를 하려 들면 그것도 괴로운 일 아닌가. 아마 나 같은 성격의 사람에게 가장 ‘현명한 내조’란 순수한 부인의 ‘평범한 내조’였을 것이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아내 변중석 여사를 언급하며 이같은 글로 존경의 뜻을 전했다.
엄한 형이자, 아버지였던 아산은 동생과 자식에게도 ‘형’ ‘오라버니’, ‘아버지’, ‘아빠’가 아닌 ‘회장님’이라고 부르게 할 만큼 무섭고 어려운 존재였다. 이에 시동생이나 자식 모두 의논할 일이 있으면 모두 변 여사를 통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렇듯 시동생과 자식들을 자애로 챙기면서 남편에게는 집안일에 일절 신경쓰지 않도록 하는 ‘무간섭의 내조’를 평생 실천했다. 속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욕 한마디 안하는 변 여사에게 아산은 “벙어리를 데리고 왔다”는 말을 할 정도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국 최고의 부자의 부인이 됐지만 그 재산에는 단 한번 쳐다 본적이 없고, 남편이 가져다 준 월급을 아껴 쓰고 저금한 돈으로 불우한 이들을 도왔다. 그나마 애착을 가졌던 유물은 아산이 6.25 직후 사준 재봉틀 한 대와 청운동 자택 장독대에 놓여 있는 장항아리였다고 한다.
이러한 변 여사의 내조는 범 현대가를 상징하는 가풍으로 자리 잡아서 인지, 범 현대가의 부인들은 모두 남편들이 대외 활동을 도와주는 내조에만 전념하고 있다.
17일은 변 여사가 별세한 지 8년째를 맞는 날이다. 16일 기일은 고인이 생전에 살던 서울 청운동 자택이 아닌 장남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의 한남동 자택에서 지냈다. 창업주 부부의 제사가 청운동이 아닌 곳에서 지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정몽구 회장이 직접 제사를 모시는 것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부모의 기일을 지내온 청운동 자택은 아산이 1958년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은 뒤 생의 마지막까지 지내왔던 곳이다. 정몽구 회장의 장남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도 유년 시절 청운동 자택에 머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애정을 받아왔던 곳이기도 하다. 정 명예회장이 별세하기 전 청운동 자택은 정몽구 회장이 물려받았지만, 정몽구 회장이 살지는 않은채 관리인을 통해 창업주 부부가 살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으며, 제사 때에만 범 현대가 가족들이 모였다.
올해 3월까지만 해도 정 명예회장 14주기 제사를 치뤘던 청운동 대신 한남동 정몽구 회장 자택으로 장소를 옮긴 것은, 앞으로 정몽구 회장이 부모의 기일을 직접 챙기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날 제사상은 정의선 부회장의 부인 정지선씨가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운동 자택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몽구 회장의 부인이자 맏며느리인 이정화 여사가 챙겨왔으나 2009년 이 여사가 별세한 뒤 가족내 최고 어른인 정 명예회장의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의 부인 우경숙 여사가가 총괄해왔다.
따라서 이번에 한남동 자택으로 제사 장소를 옮기고, 정의선 부회장 부부가 제사를 준비했다는 것은 가문의 장손으로서 정 부회장 부부가 집안을 도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날 제사에는 범 현대가 일가가 대거 참가했다. 제사와는 별도로 오는 11월 25일인 아산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산 탄생 100주년 행사는 범 현대가 이외에도 아산이 회장을 맡으며 애착을 갖고 키워온 전국경제인연합회도 별도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