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세보지는 못했지만 수천점이 될겁니다." 전시장 끝 벽면을 채운 고물상같은 작업실을 찍은 사진 앞에서 그는 '열락의 세상'에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광주, 포항에서 이어 전시하는데 너무 기뻐 잠이 안 온다"고 했다. 이미 30년전, 미국 유럽 미술시장에서 '한국작가 변종곤'으로 유명해진 후 금의환향이다. 지난해부터 한국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잇따라 열고 있다. "서울에 오니 반응이 더 뜨겁다"며 상기된 그를 더페이지갤러이에서 만났다.
곱슬거리는 단발머리, 무릎까지 오는 부츠에 검은 진바지를 입은 그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동안남'이다. 따져보면 한국전쟁 이전에 태어난 1948년생이지만 50대 후반 전후로 보인다 . "술과 담배를 전혀 안하고 운동을 한다"는 그는 "작가들은 몸 관리를 해야 한다"며 매끈한 피부를 자랑했다.
속박과 굴레가 없어보이지만 아픔속을 걸어왔다. 젊은시절 그는 '반미운동가'기질을 보였다. 중앙대 회화과를 나와 대구 대건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 생활을하다 1978년 제1회 동아일보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극사실주의화가로 이름을 날린더때였다. 그러나 철수된 미군 공항의 모습을 그렸다는 이유로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혔다. 1981년, 정치적 탄압과 지나친 감시로 도망치듯 미국 땅을 밟았다. "그때는 장발단속도 했어요. 어떻게 국가가 한 개인의 사생활까지 간섭을 하는지에 대해 분노했었죠.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게 가장 큰 문제였고요."
반미감정을 품었던 그의 미국행은 아이러니다. "파리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림이 안될 것 같았죠. 미국은 절친인 한대수도 있었고, 미국의 팝아트와 내 작품이 잘 맞을 것 같았어요."
"주머니에 죽음을 넣고 다닐 정도”로 미국에서 삶은 죽음 같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창작의 자유를 만끽했다. 마음을 바꾸고, 변태하니 즐거웠다. 돈이 없어 재료를 살 엄두도 못 냈지만 천국에 온것 같았다. 길가에 냉장고나 라디오등 버려진 물건들이 천지였다. 날마다 물건을 들고 집으로 가져갔다. "내가 외로워서 그런가?" 주워온 물건들을 해체해보니 인간과 닮은 듯했다.
"차갑게 내동댕이쳐진 물건들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사람의 손맛을 탔기때문일까요. 버려진 물건은 온기가 달라요. "
"다양한 오브제들로 작품으로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외로움도 잊을 수 있었다”는 그는 그렇게 '오브제 집착남(자)'이 됐다. 주워 모은 물건들은 어는 순간 엄청나게 불어났다.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면 "이봐, 이 물건 얼마에 팔아야하지?" 하고 물어볼 정도로 '잡동사니 왕'이다.
■혼수품으로 인기 '바이올린 작가' 유명세 싫다
버려진 물건을 주워 예술작품으로 창조해낸 그는 미국에서 '오브제 아트'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에서 그가 드러난건 1988년 서울올림픽때다. 당시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로 부상한 백남준과 함께 귀국해 전시를 열었다. 김포공항에 내렸을때 커피를 든 손이 달달 떨릴 정도로 (쫓기듯 간) 한국에 온게 두려웠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은 이전 모습이 아니었다. 높은 빌딩, 깨끗한 거리, 사람들도 나라도 변했다. 전시에 나온 바이올린 작품이 인기였고, '바이올린작가'로 유명세를 탔다. 부잣집 자제들이 결혼할때 혼수품으로 선물할 정도로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작가는 달갑지 않았다고 했다. '능력을 발휘하기 좋은 오브제'였지만 바이올린 작가로 규정되는게 싫었다.
"그렇게 불리는게 화가 나 7∼8년 전부터는 작품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요". 그는 "돈맛을 보면 간사해지고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금방 계산해 내"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은 그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오브제아트'는 이방인으로 살면서 외로움에 지쳐 선택한 탈출구다. 20세기 후반 팝아트 혹은 추상미술과 같이 기존의 미술 사조와는 다른 형식이 추구되던 미국미술에서 변종곤은 아상블라쥬라는 형태의 색다른 기법을 채택했다. 외로움과 이질적인 문화의 충돌에서 오는 마찰을 오브제로 풀어낸 새로운 장르의 창조였다.
오브제로 만든 작품은 어떤 특정한 사조에 얽매여 있지 않고 자유로움 그 자체다. 그의 생각이 발광하면 포복절도할 작품이 뚝딱 만들어진다. 종교적 주제나 인간의 실존, 현대물질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담겼지만 작품은 무겁지 않다. 그래서 매력이다.
“이질적인 것의 만남과 충돌에서 창조가 이뤄집니다." 낡아빠진 물건들은 그의 손을 통해 의미를 부여받고 생명력을 얻는다. 동양과 서양, 성과 속, 과거와 현대, 싼 것과 비싼 것,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남과 여, 오리지널과 카피, 정지와 움직임, 천사와 악마, 진지함과 가벼움을 넘나들며 재미까지 선사한다. "30여년간 타지에서 그림만 그려서 먹고 살았다"는 그는 "오브제들은 가족이자 내 일부분과도 같다”고 했다.
■ 미국서 그림으로만 살아남아 "재밌는 작업이 모토"
"해외에서 작품활동하며 이룬 것을 꼽는다면…. 글쎄요.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림으로 살아남았다는 점입니다."
미국 미술계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뉴욕타임즈 문화면 단골작가이기도 하고 3년 전에는 프랑스출신 영화감독 마리 조지에가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찍어서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상영했다. 모마에서 동양작가의 다큐가 상영된 건 처음이다.
그는 미국에 가 완전히 백지상태로 다시 시작했다고 말했다. "모든걸 버렸어요. 내가 누구다 이런 생각도 없이, 순수하게 다 받아들였어요. 그러니까 보이더라고요."
이전에는 굳이 동양적인 것, 서양적인 것을 의식하지 않고 작품활동을 하려 했지만 이제는 "제 작품에 동양적인 것이 들어 있다. 그건 버릴수 없는 정신과 같다"고 했다.
작품은 여행을 통해 탄생한다. 돈이 생기면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로 떠나 그곳의 문화를 경험하고 작품에 녹여낸다. "한국에서 놀라운건 모두가 핸드폰만 보고 있다는 점"이라는 그는 "잔인한 사건이 쏟아지는 것도 감정없는 기계하고만 붙어있어 그런 현상이 나온다"며 안타까워했다.
"특히 작가라면 여행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험한 여행을요.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야해요. 인문학책. 교보문고에 갔더니 책을 읽는 학생들이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00세시대, 청춘은 짧고 노후는 길다. 앞으로 계획은 "딱히 없다”고 했다. "뭘 할 건지,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재미있게 작품 활동을 계속 할겁니다.아직 안쓴 오브제들이 많거든요.하하하~"
성스러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슈퍼맨 피에타'등으로 변신시킨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연 개인전은 소비문화를 비틀거나 찬탄한다.
이질적인 오브제들이 결합됐지만 세월이 관통하는 물건들이 조합된 작품은 욕망을 자극한다. 일단 보기만해도 재미있어 눈을 반짝이게 한다.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다.
모나리자가 가슴을 드러내 놓고 있고, 수염을 달고는 이어폰으로 아이팟의 음악을 듣고 있다. 반짝이는 보석 반지에 팔찌와 목걸이까지 한 모나리자는 흐뭇한 표정으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끌어안고 있다.
커다란 와인병과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현악기에 그림을 그리거나 신부와 수녀가 키스하는 사진으로 사회적 논쟁거리가 된 의류업체 베네통 광고를 패러디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샤넬 향수를 들고 있는 인디언의 모습을 통해 물질 만능주의적 사고를 지적한 회화작품 ‘굿모닝 아메리카’는 '극사실주의 대가'라는 '미친 손맛'을 확인할수 있다.
"팔았던 문제가 생겨 반품하거나 다른 작품으로 바꿔달라고 하면 다시 만난 가족처럼 너무 너무 좋다"는 그는 "작품을 파는 것이 아직도 (아까워)문제"라고 껄껄거렸다.
프랑스 아프리카 인도등 각지에서 수집한 오브제들은 상처를 이겨낸 시간의 위력의 에너지가 팽팽하다. 1000여평의 넓은 더 페이지갤러리는 변종곤의 유쾌발랄한 스튜디오같다. 60여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2월 15일까지다. (02)3447-0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