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전 의원은 11일 오전 11시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해 "강자를 위한 정당으로 퇴화하고 있다"며 "정권교체의 희망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오늘부터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을 촉구하는 모임(국민모임)이 최근 요구한 시대적 요청에 동참하고자 한다"고 탈당을 선언했다. 정 전 의원은 "민주진영과 진보진영의 대표적 인사들이 참여한 국민모임이 지향하는 합리적 진보 정치, 평화생태복지국가의 대의에 동의한다"고 덧붙였다.
국민모임은 종북주의 배격 등 합리적 진보를 표방하는 인사들이 주도하는 결사체로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이수호 전 민노총 위원장, 영화감독 정지영, 명진 스님 등 각계에서 명망과 인지도를 갖춘 인사 100여 명이 소속된 모임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얼마나 고단하십니까. 어제도 안타까운 소식으로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아프셨습니까. 희생자 가족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상을 입은 분들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밝았지만, 세월호의 상처와 아픔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세월호 이후 대한민국은 달라져야 한다.’ 모두가 원했고 공감했습니다. 하지만 4월 16일 그날 아침과 오늘 현재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장사는 안되고, 취직도 안되고, 미래는 불안하고, 정치는 겉돌고, 약자는 기댈 곳이 없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딜 가나 ‘정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아우성뿐입니다. 절망과 실망이 클수록, 한 줄기 희망의 씨앗을 보고 싶은 간절함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엊그제 다시 팽목항을 찾았습니다. 팽목항에는 유난히 차가운 바람과 거센 파도가 마치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삼킬 듯 회오리쳤습니다. 세월호 참사 아홉 달이 되도록, 여전히 실종자 가족들은 팽목항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딸 조은화, 허다윤양, 우리 모두의 아들 남현철, 박영인군, 단원고 고창석, 양승진 선생님, 여섯 살 혁규 어린이와 아버지 권재근님, 그리고 이영숙 어머니. 이렇게 실종자 아홉 분은 아직도 얼음 같이 찬 바다 물속에서 누군가 건네줄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정치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길이 되어 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또 반성했습니다. 정치를 제대로 했으면 저 304명의 고귀한 생명을 허무하게 바다에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에,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과연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부끄럽습니다. 세월호와 함께 정치가 실종되고 희망이 침몰한 상황에서 저의 정치적 결정과 행로가 무슨 대단한 일이겠습니까만, 그동안 저에게 크나큰 사랑을 주신 국민과 당원 여러분께 설명을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을 촉구하는 모임’(국민모임)이 최근 요구한 시대적 요청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 민주-진보 인사들이 참여한 ‘국민모임’이 촉구한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소명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심적 인사들의 목소리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응답하는 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자세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좋은 정치, 좋은 정당의 출현에 밀알이 되고 밑거름이 되겠습니다. 이 길이 저에게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가시밭길이고 바람 부는 광야라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저의 시대적 소명이라면 그 길을 걷겠습니다.
- 반성하고 또 반성하겠습니다 -
저는 이미 2010년 8월 공개적으로 반성문을 제출했습니다.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오랜 개인적 성찰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용산참사 현장 추모 미사에 참석했을 때 신부님이 말씀했습니다. “여기 정동영 의원이 왔습니다. 지난 대선 때 정 후보가 조금만 잘했더라면, 이분들은 용산에서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정치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2007년 대선 패배에 대한 자책감과 죄책감이 몰려 왔습니다.
정치가 진정 필요로 하는 곳은 서울 여의도가 아니라, 저 낮은 현장의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용산은 저의 반성과 성찰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이제 땅 위 30cm 허공에 떠서 정치하던 과거의 정동영은 없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피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현장의 정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시대의 아픔에 제대로 함께하지 못했고, 진심으로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고, 개인적으로도 정치인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습니다. 미국의 금융위기를 보면서 신자유주의가 가져 올 폐해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지 못했다는 뒤늦은 책망도 했습니다. 왜 미리 알지 못 했느냐고 꾸짖는다면, 제가 무슨 답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해 왔는가,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해 왔는가?’라는 물음 앞에 묻고 또 물었습니다. 국민에게 진 정치적 부채는 치열한 실천을 통해 갚아 나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담대한 진보의 길을 뚜벅뚜벅 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사람이 운동권처럼 저렇게 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수군거림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 저의 '합리적 진보' 실천은 새정치연합에서 좌절했습니다 -
저는 공개 반성문 발표 이후 끊임없이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두 기둥으로 한 ‘담대한 진보’를 민주당 안에서 실현해 보고자 했습니다. 민주당은 저에게 정치적 뿌리이자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품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어머니 같은 품 안을 떠나려고 하겠습니까? 저도 정치인 이전에 고독 앞에서는 몸부림치고, 낯선 길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끼는 어쩔 수 없는 한 인간일 뿐입니다.
정통 보수정당에서 출발한 민주당은 시대 흐름에 맞게 ‘정치가 김대중’을 통해 중도개혁 정당으로 진화했습니다. 이제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을 넘어 합리적 진보 정당으로 더 정치적 진화를 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신자유주의로 심화된 양극화를 극복하고, 계층과 지역, 다문화, 성적 지향 등을 차별하지 않는 통합된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대부분 선진국은 이미 보수와 진보로 양분된 정당 사이에 순환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사회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당을 합리적 진보 정당으로 진화시키기 위해 지난 2010년 전당대회에서 당헌 개정안을 대표 발의해 당원주권 조항과 함께 보편적 복지 조항을 명문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 강령에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노동권 보장, 원전 반대, 한반도 평화 체제 추구 등을 포함하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60년 야당 정치사상 처음으로 당원이 주인 되는 진보적 민주당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 사태 등을 통해 분출된 노동권 강화와 비정규직 차별 철폐, 한미FTA 재협상과 투자자-국가소송제(ISD) 폐지 등은 제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제기해 온 진보적 의제들이었습니다.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이 사회적·정치적 의제가 되었고, 2012년 총선·대선의 최대 쟁점으로 부상했습니다. 한진중공업 고공 크레인에서 농성 중이던 김진숙씨가 309일 만에 무사히 땅을 밟았을 때 “보고 싶었습니다”는 말을 건네면서 느낀 감동은 아직도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주권 침해의 독소 조항이 담긴 한미FTA 날치기 무효화 투쟁은 ‘야당다운 야당’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이때 민주당 지지율이 여당을 역전했습니다. 민주정부의 핵심 정책인 햇볕정책에 수정을 가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당론을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은 제가 실현하고자 했던 합리적 진보를 지향하는 민주당이 아닙니다. 당헌과 강령들에서 제가 정치적 생명을 걸고 추구해 왔던 진보적 가치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습니다. 중도 우경화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이런 가치들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중산층이 서민으로, 서민이 빈민으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데도, 새정치민주연합은 서민과 중산층이 아닌 ‘중상층’(中上層)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새누리당 따라 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에 진정으로 서민과 사회적 약자, 노동자들이 기댈 정당은 사라졌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쪽으로 더 진화하지 못하고, 사회적 강자를 위한 정당으로 퇴화하는 것을 보면서 저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지난 6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구나 하는 현실 앞에 참담했습니다. 지난해 세월호 협상 과정에서 새정치연합이 박근혜 대통령의 가이드 라인에 따라 여당 협상안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보면서 야당 정신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상 어느 나라에 대통령 지시에 따라 협상하는 야당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 합리적 진보와 야당성마저 사라진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국민의 기대와 정권교체의 희망을 발견하기 어렵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 사회적 약자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좋은 정당'이 필요합니다 -
제1야당마저 ‘우경화의 늪’에 빠져 새누리당과 가까워지면, 양극화의 심화로 갈수록 고통 받는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은 누가 대변해야 합니까. 그들의 눈물은 누가 닦아줘야 합니까. 바로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고, ‘국민모임’이 가고자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성장률과 함께 자살률이 증가하는 사회는 결코 행복한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더욱이 아닙니다.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한국 사회를 통합이 아니라 해체의 방향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정치적 결과물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민주주의 제도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가난하고 힘없는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의 존재가 간절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더 좋은 정당’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가 분출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치는 책상머리의 관념이 아니라, 실제 대중들의 삶에서 밥을 먹여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좋은 정당만이 서민과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자영업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이들 서민의 팍팍한 삶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랜 고민 끝에 오늘 새정치연합을 떠나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정치를 촉구한 ‘국민모임’의 시대적 요청에 동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민주진영과 진보진영의 대표적 인사들이 참여한 ‘국민모임’이 지향하는 합리적 진보 정치, 평화생태복지국가의 대의에 동의합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통한 재벌개혁과 비정규직·노동 문제 해결, 친환경 생태국가, 여성과 사회적 약자가 차별받지 않는 인권국가, 남북평화를 통한 북방경제 개척과 평화체제 수립이 우리가 지금 가야 할 길입니다. 또한 생명과 안전,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위한 규제는 강화해야 합니다. 공익을 해치는 무분별한 민영화는 멈춰야 합니다. 이 길만이 실의에 빠져 있는 국민께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은 또 하나의 갈래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길이 아닌 새로운 큰길을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길은 대중이 드나드는 대로(大路)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새정치연합과 진보정당들을 넘어서서 새로운 큰길을 만들라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믿습니다.
이 길만이 양극화를 극복하고, 서민의 삶을 지키며, 역행하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미래 청년세대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 길만이 정권교체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정치 인생의 마지막 봉사를 이 길에서 찾겠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백의종군의 자세로 기꺼이 정권교체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2017년 정권교체를 위한 하나의 벽돌을 쌓는 데 낮은 곳에서 작은 땀방울을 흘리겠습니다. 모든 비판은 달게 받겠습니다. 언젠가 제 진심을 이해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위안 삼아 광야에 서겠습니다. 지금은 혼자지만 나중에 수많은 동지들이 함께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1월 11일
정 동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