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안선영 기자 = 1997년 SBS 드라마 '모델'로 데뷔한 배우 장혁(37)은 최근 종영한 MBC 수목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극본 주찬옥·연출 이동윤·이하 '운널사')를 서른번 째 필모그라피에 올렸다.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배우의 삶 덕분에 연기에는 자만 아닌 자신감과 확신이 묻어났지만, 역설적이지만 그 안에는 신인배우의 모습이 녹아있다.
단순히 열심히 임해야겠다는 의지나 생각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촬영이 없는 날에도 촬영장을 찾았고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 속에 담고 있었다. 연기에 대한 고민과 이를 풀어나가기 위한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장혁을 지난 18일 서울 역삼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최근까지 이어진 '운널사' 촬영 탓에 얼굴은 조금 야위었지만 그의 모습은 드라마 속 유쾌한 이건, 그대로였다.
"'운널사' 팀과 당분간 만나지 못한다는 게 가장 슬프죠. 이 팀이 다시 한 번 뭉쳐서 로맨틱 코미디든, 다른 어떤 장르든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요. 매 작품마다 얻는 게 분명히 있지만 '운널사'는 무엇보다 좋은 연출자와 좋은 배우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으니까요. 아, 재미있는 캐릭터를 얻었다는 것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장혁은 전주 이씨 집안의 9대 독자 이건으로 분해 '운널사'의 웃음을 책임졌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거만한 성격을 옮겨 놓은 듯한 웃음소리는 얄밉다기 보다 쾌남, 유쾌한 허세남의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게 만드는 힘이랄까. 아무리 진지한 상황이라도 이 웃음 한 방이면 분위기는 단숨에 바뀌어 버렸다.
"처음 이건 캐릭터를 잡을 때, 스크루지의 젊은 날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스크루지는 지독하게 인정이 없고 관계는 다 끊어진 채 혼자 사는 노인의 모습이잖아요. 나중에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이 찾아와 시간 여행을 떠나 휴머니즘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라는 점이 건이와 비슷한 느낌이더라고요, 건이는 유령 대신 김미영(장나라)가 찾아오니까요."
시청자도 장혁의 노력을 알아챘다. 그를 수많은 닉네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 김미영에게 감정을 느낀 후 그녀를 180도 바뀐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장면은 '건린라이트', 부부가 함께 하는 태교교실에서는 '음란건귀', 김미영과 듀엣 곡을 부를 때에는 'TJ랩건' 등으로 표현했다. 장혁은 "캐릭터가 던지고자 했던 것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는 뜻"이라며 "닉네임이 붙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웃어 보였다.
장혁은 18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착실히 쌓아왔다. 특히 매년 1~2작품을 쉬지 않고 연기 활동을 이어왔다. 그리고 '운널사'는 그의 연기 인생에 또 다른 겹(layer)을 만들었다. "벌써 서른번 째 현장을 다녔지만 늘 다르다"는 장혁은 "캐릭터도 다르고 만나는 배우도 다르다 보니 매번 현장이 새롭다. 앞으로도 그런 현장이 계속 있을 텐데 거기서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강한 욕심을 드러냈다.
그에게 연기는 매 순간 어렵고, 반대로 매 순간 쉬웠다. "누군가 '이거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설득력을 갖고 이해시키면 그걸로 된다고 생각해요, 설득력 있는 연기야 말로 가장 공감하기 쉬운 형태니까요. 정답이 아니라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모범답안을 찾고자 했죠. 캐릭터가 힘들다는 건 앙상블이 맞지 않는 제작진, 배우와 작업했다는 걸 의미해요. 반대로 처음으로 해 본 장르, 캐릭터인데도 편하게 갈 수 있는 건 같이 호흡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요".
마흔, 그리고 데뷔 20주년을 앞두고 있는 그이지만 연기에 대한 생각은 늘 같다. 현장에 가서 부딪히자. "현장만 가면 무언가를 배우는 기분"이라는 장혁. 신인배우가 배워야할 기본 덕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