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왼쪽 두번째)과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네번째)이 지난 2010년 5월 화성사업장 내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해 첫 삽을 뜨고 있다. |
한국이 IT 강국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데는 삼성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경공업 중심의 사업구조로 성장해왔던 삼성이 IT 분야에 진출하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난관을 넘어야만 했다.
현재 삼성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삼성이 이룩한 반도체 성공신화의 서막을 연 것은 이건희 회장이었다.
1974년 중앙일보 이사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던 이 회장은 삼성 창업주인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 진출을 건의했다. 호암은 사업성 검토를 지시했지만 메모리 반도체 생산라인 1개를 건설하는데 1조원가량이 투입되고 매년 연구개발(R&D)에 수천억원의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반도체 사업이 아직 시기상조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 회장은 "언제까지 선진국의 기술 속국으로 있을 수는 없다"며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에 삼성이 나서야 한다"고 반도체 사업 진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뒤 호암은 일본의 저명한 경제관료이자 경제평론가였던 이나바 히데조 박사와의 면담을 통해 일본 경제가 제철·조선·석유화학 등 기존의 주력산업 비중을 줄이는 대신 반도체·컴퓨터·기계공학 등의 신수종 사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결국 호암은 1983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은 코웃음을 쳤지만 삼성은 1986년 7월 1메가 D램 생산을 시작하면서 성공신화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1987년 12월 1일 삼성 회장으로 공식 취임한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한 발 앞선 전략적 선택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꿔왔다.
실제로 D램 반도체 기술방식이 스택(웨이퍼 위에 셀을 쌓는 방식)과 트렌치(웨이퍼 표면을 파내 셀을 쌓는 방식)로 양분됐을 때 삼성은 일본 반도체 업체들과 다른 스택 방식을 채택했다. 또 1990년대 6인치 웨이퍼가 주류를 이뤘던 시절 삼성은 8인치 생산을 결정했다. 이 두 가지 선택은 삼성이 향후 20년 동안 반도체 시장 1위를 질주할 수 있었던 핵심 경쟁력이 됐다.
반도체 사업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둔 이 회장은 휴대폰 사업으로 눈을 돌린다. 삼성은 1994년 10월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하면서 경쟁에 뛰어들었다. '애니콜은 한국 지형에 강하다'는 슬로건으로 인기몰이를 하면서 출시 후 수개월 만에 시장점유율 30%를 돌파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5년 3월 9일 오전 10시. 삼성전자 구미운동장에 불길이 치솟았다. 휴대폰과 무선전화기 등 10만대가량의 삼성전자 제품들이 산산조각이 난 채로 불구덩이 속에 던져졌다. '품질확보'라고 쓰인 머리띠를 두른 2000여명의 직원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 이른바 삼성의 '휴대폰 화형식'이었다.
이날 폐기처분된 제품은 500억원 상당으로, 당시 삼성전자의 총이익은 9500억원 수준에 불과했다. 화형식은 이 회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삼성 휴대폰은 잘 팔렸지만 품질에 대한 불만도 함께 커졌다. 국내 시장 점유율은 높았지만 모토로라 등 선진 업체들의 제품보다 저평가를 받았으며 글로벌 시장 진출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 회장은 "고객을 두려워하고 휴대폰 품질에 신경을 써야 한다"며 "돈을 받고 불량품을 파는 것은 고객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휴대폰 화형식은 삼성 품질경영의 시발점이었으며, 이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부르짖은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의 연장선이었다.
품질에 대한 삼성의 집착은 스마트폰 부문의 갤럭시 신화로 이어졌다. 지난달 말 기준 삼성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31.3%로 1위를 기록했다. 2위인 애플은 15%에 머물러 이제 라이벌이라는 수식어가 민망할 지경이 됐다.
삼성 관계자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비웃을 때 이 회장은 반도체와 휴대폰, TV 등의 부문에서 역전 드라마를 이뤄냈다"며 "그것이 지금의 IT 강국 대한민국을 있게 한 초석"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