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강행 처리로 정국이 급속도로 경색되면서 기업·금융·부동산 관련 법안이 방치되고 있어서다. 법안 처리 지연은 실물경제로 곧바로 영향을 미치고 위기 극복을 위한 내년도 기업 전략 수립에도 차질을 부르고 있다. 서민생활에도 직격탄이 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이들 법안은 내년 4월 총선과 맞물려 법안은 자동폐기될 운명에 처했다.
일반 지주회사에 대해 금융자회사 보유를 허용하는 독점규제·공정거래법 개정안은 2년 반 동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친 대기업’ 법안으로 낙인찍혀서다. 당초 법안 처리를 촉구하던 한나라당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현정부와 차별화를 선언한 상황이어서 법안 통과가 불투명하다. 이 때문에 기업·서비스 규제를 통해 실물기업의 투자를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구상이 깨질 판이다.
법안 처리 지연 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 방침을 믿고 지주사체제로 전환한 SK는 지난달 과징금 50억원을 맞았다. 앞으로 100개 가까운 기업이 줄줄이 과징금을 물어야할 상황에 몰리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면서 지주사체제로 전환을 유도한 것은 정부”라며 “정부를 믿고 따른 기업에게 과징금 부과는 역차별”이라고 비판했다.
상법 개정안의 경우 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해 방어수단을 가질 수 있도록 일명 ‘포이즌필’제도 도입을 골자로 삼았지만 야권이 대기업 특혜제도라고 반발하고 있다.
한나라당 정책위 관계자는 “당에서 쇄신을 요구하면서 현정부의 기업친화정책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며 “국회의원들이 내년 총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금융산업 선진화를 위한 핵심법안 처리도 적신호가 켜졌다. 특히 헤지펀드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자본시장법이 연내 처리되지 않으면 ‘자본시장의 새로운 도약’이라는 정부 플랜은 물론 업계의 혼란마저 우려되고 있다.
증권계의 한 관계자는 “헤지펀드 등록을 위해 대규모 증자 등을 통해 시장 진출 준비를 마쳤는데 법안 통과가 늦어져 내년도 경영 차질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민생법안의 지연은 국민 생활과 직결된다. 내년 전셋값이 5% 오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전월세 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 도입을 골자로 한 주택임대차 보호법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대출 금리가 오름세인 상황에서 지난달 말 은행의 전세자금 대출 잔액은 4조3142억원에 이르고 있다. 이는 2년새 5배로 늘어난 수치다. 이 때문에 서민들의 전세난은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사는 박모(32세)씨는 “물가가 오른 상황에서 전셋값까지 뛰고 있어 이중고”라면서 “출산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며 정치권에 분노했다.
주택난 해결을 위한 활성화 방안도 멈춘 상태다. 2년 넘게 국회에 계류된 민간택지의 아파트 분양가상한제 폐지를 담은 주택법 개정안이 그 예다. 한나라당과 정부가 재개발·재건축에만 분양가상한제를 폐지토록 하는 절충안도 내놨지만, 야권의 반대로 해결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입법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여야 공히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이 실종됐기 때문”이라며 “대화와 타협보단 결정적 순간에 힘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극단과 배제의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