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김황식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만제 초대 KDI 원장, 허태열 국회 정무위원장, 조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등 국내 경제학자들이 다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아주경제는 많은 축사와 치사 등이 나온 가운데 특히 큰 호응을 받은 김정렴 전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의 기념연설을 4회에 나누어 싣는다.
(3회) KDI의 설립과 초기 연구 업적
KDI는 1975년부터 3년에 걸쳐 미국 하버드 대학교와 공동으로 한국경제·사회의 근대화과정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는 보고서 12권에 달하는 방대한 연구였다.
하버드 대학교 학장을 역임한 미국 측 연구책임자 메이슨 교수는 총론에서 “박 정권은 권위주의 정권으로 성공적인 경제개발을 이루었으나, 정치에 있어서는 억압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소신껏 비평하기도 했다.
본인이 당시 상황을 회고해 보면, 휴전 후 소련이 북한의 중화학공업 재건을 위해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동독, 헝가리, 체코에게도 방위산업의 한 부문씩을 원조하도록 함에 따라 1960년대 후반 이후 북한의 전력은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다.
1967~68년 2년 동안 무려 570건이 넘는 남북 간 교전사태가 발생했고, 북한은 1968년 1월 21일의 청와대 습격, 美 정보함정 푸에블로호 납치, 삼척·울진지구의 1개 중대 병력 침투, 휴전선 이남까지 침투할 수 있는 3개의 땅굴 구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발행위를 계속했다.
한편, 미국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에서는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美 7사단을 철수시켰으며, 카터 대통령은 美 지상군 완전철수 공약을 발표했다.
마침내 월남과 캄보디아가 패망하면서 동아시아는 홍콩과 마카오를 제외하고 공산화되었다.
1970년대 들어 적십자회담을 필두로 남북대화가 시작되었으나, 북한은 반공법 및 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는데 더해 ‘우리 민족끼리 논의하자’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쳐, 언론을 일부 통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메이슨 교수의 연구보고서 국문판은 박 대통령 서거 후인 1981에 출판되었는데, 박 대통령이 생전에 접했다 해도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한 고심(苦心)을 모르는 태평성대의 논평’이라고 가볍게 말씀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정렴 前 대통령비서실장>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정렴 前 대통령비서실장은 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한 후 주일대사를 사임한 80년까지 약 2년간의 공백을 빼고는 24년에 걸쳐 대한민국 중앙은행과 행정부에서 공직을 역임했다. 재무부, 상공부 장관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김정렴 前 대통령비서실장은 경제개발정책의 수립과 집행 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한국경제 발전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9년 3개월의 재임기간으로 역대 최장수 대통령비서실장의 기록을 세운 김정렴 前 비서실장은 주일대사직을 마지막으로 말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