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 21일 밤 10시. 정주영은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86세 때였다. 그는 며칠 전 건강 악화로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특히 이날 오후 병세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장남 정몽구를 비롯, 정몽헌, 정몽준 등 아들들이 병실에 속속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120살까지 살 겁니다”= 그는 농군의 아들답게 청년 시절부터 건장했다. 노년에도 청년 못지 않은 활동력을 보였다. 60세가 넘어서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 20대 젊은이들과 씨름판을 벌였다. 70세가 넘어서도 건강을 위해 종종 단식을 하곤 했다.
무엇보다 7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내가 집권한 뒤 하루라도 결근하면 즉시 청와대에서 내쫒아도 좋다”고 호언장담 했다.
작고하기 두 해 전인 1999년, 84세의 정주영은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120세까지 살면서 큰 일을 할 것”이라며 “아직 은퇴하기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120살까지 살면서 남은 36년 동안 뭘 하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북한과 제3국 건설시장 진출, 통신사업 등 자신의 구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는 말에 그치지 않았다. 실제 그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2000년 말 직전까지 대내외 활동을 이어갔다. 2000년 6월 북한에 가서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했다. 2000년 말까지 명예회장 직함으로 그룹의 신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현대그룹이 그의 손길을 완전히 벗어난 건 2001년 이후였다.
하지만 이 거인도 세월의 흐름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1992년 대선 이후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낙선 후 현대그룹이 대선 불법자금 조사 등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고 정주영 회장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후 1994년 리펑 중국 총리 영접, 1995년 현대그룹 신년 하례회 등 그가 수척해진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의 건강 악화설이 나돌았다. 주가는 그 때마다 폭락했다.
그는 1998년 소떼 방북이라는 전 세계적인 이벤트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과시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2000년 6월 방북 때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장시간의 술자리 가진 이후, 그는 수시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리고 2001년 3월 초, 청운동 앞 뜰에서 쉬던 중 73세의 집사에게 “너는 나이도 어린데 왜 그렇게 머리가 허연가”라는 농담을 하며 껄껄 웃은 게 결국 외부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말이 됐다. 그의 나이 86세 때였다.
◆“남은 것은 흑백 TV 뿐”= 정주영은 28개 대기업을 키워낸 총수, 전국경제인연합회 최장 기간 회장, 세계 100대 부호라는 갖가지 수식어 답게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그의 아들들이 조문객을 맞는 가운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직 대통령과 당시 여.야당 대표가 조문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사람을 보내 헌화했다. 북한이 한국에 조문단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북한의 조문단은 지난해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빈소에는 최대 경쟁자였던 이병철 창업주의 아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물론 막역한 사이로 알려진 구자경 LG 명예회장 등이 다녀갔다. 전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과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 등 20년 넘게 동고동락했던 동료들도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그는 마지막까지 소박한 자신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않았다.
빈소가 마련된 청운동 자택 2층 고인의 방에는 낡은 침대와 간소한 가구, 29인치 텔레비전 밖에 없었다. 빈소는 평소 그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양친인 정봉식.한성실의 묘와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졌다. 100평 남짓한 규모였다.
지난해 10월 필자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부인인 고(故) 이정화 여사의 장례식 때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정주영 일가의 묘가 한 곳에 모인 이 곳엔 수많은 소나무가 빽빽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정주영이 태어났던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를 연상시키듯.
◆그가 이뤄놓은 것들= 정주영은 일평생 한 사람이 해 낸 것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업적을 기록했다. 시골 농사꾼 아들이 무작정 상경해서 28개의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냈다. 말년에는 시베리아 개발, 대북사업 등 기업인이란 한계도 뛰어넘었다.
소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가 1996년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추천된 것은 이 같은 업적 때문이었다. 그의 추천장에는 ‘맨손으로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이룩한 주인공으로, 한국의 경제 부흥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적혀 있다.
특히 그의 업적은 개인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한 개인이 국가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 다소 과대 포장된 것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이란 가정을 해 보면 그가 남기고 간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박정웅 전 국제담당 상무는 정주영 회장을 10년 동안 모시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을 통해 ‘정주영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경제의 위상은 어떤 위치에 놓여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유일한 해외 고속도로 건설 경험을 가진 정주영의 현대건설이 없었다면 경부고속도로 건설(1968~1970년)은 1~2년 늦춰지는 데 그치지 않았다. 1970년대 초 곧바로 중동 석유 파동으로 세계 경기가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중공업 강국으로 만든 조선사업도 그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었으리란 건 대부분 경영인과 경영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이다. 이는 1970년대 중반 중동 건설시장 진출도 마찬가지였다.
현재로써 그가 일궈낸 가장 큰 업적은 미국 포드자동차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동차 독자 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기술력 제공과 해외 시장 제제라는 포드의 당근과 채찍 앞에 선 그는 독자 기술 개발이라는 제 3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현대기아차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포드를 포함한 미국 빅3와 도요타.혼다 등 일본 자동차 제조사가 주춤하는 가운데 세계 톱5 자동차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그가 1974년부터 1984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으며 일궈 놓은 한국 브랜드 인지도와 88올림픽 유치 역시 그의 공로가 크다. 현재는 크고 작은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끊겨 있지만, 그가 말년에 물꼬를 튼 대북사업은 남북대화의 거의 유일한 창구로 남아 있다.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