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반도체 황제'에 등극하면서 기업들 간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그에게 선택을 받은 반도체 기업은 함께 상승세를 타지만 선택받지 못한 기업은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빅테크에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제조업 경쟁력마저 종속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6일(현지시간) 황 CEO는 CES 2025 개막 기조연설에서 소비자용 그래픽처리장치 'RTX 블랙웰'을 처음 공개하며 미국 마이크론의 7세대 그래픽 메모리(GDDR7)를 탑재했다고 밝혔다. 당초 업계에선 엔비디아가 생산능력이 우수한 삼성전자 GDDR7을 쓸 것으로 예측했으나 이를 정면으로 부인한 것이다
대만 TSMC와 SK하이닉스도 황 CEO에게 선택을 받은 기업이다. 대만 경제일보는 지난 3일 씨티증권 보고서를 인용해 엔비디아가 올해 애플을 밀어내고 TSMC 파운드리의 최대 고객사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애플 물량을 수주해 삼성전자와 격차를 벌린 TSMC가 엔비디아로 배를 갈아타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씨티증권은 "엔비디아가 TSMC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해 2배 수준인 20% 안팎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TSMC 매출에서 25%를 차지하는 애플을 위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엔비디아가 최신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양산하기 위해 생산 단가가 높은 3나노 미세공정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는 데 따른 변화로 풀이된다.
SK그룹이 CES 2025에서 강조한 AI 데이터센터 사업 성패도 결국 황 CEO의 선택으로 귀결된다. SK하이닉스가 현재 양산하고 있는 12단 HBM3E(5세대 고대역폭메모리) D램은 전량 엔비디아로 공급되며 회사 실적 개선과 매출·영업이익 경신을 이끌고 있다. SK텔레콤이 미국 람다와 손잡고 진행 중인 GPUaaS(서비스형 GPU) 사업의 성패는 엔비디아 데이터센터 GPU를 얼마나 원활하게 수급·관리하느냐에 달려 있고, SK엔무브의 액침냉각 솔루션도 엔비디아가 블랙웰부터는 액침냉각이 사실상 필수라고 강조하면서 급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SKC·앱솔릭스의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 유리기판도 결국 엔비디아가 큰손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황 CEO 간 일화도 이러한 관계를 뒷받침한다. 최 회장은 지난해 황 CEO와 만난 자리에서 6세대 HBM인 'HBM4' 공급을 6개월 앞당겨 달라고 요청한 것에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 입을 빌려 노력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바 있다. SK하이닉스가 최근 실물을 공개한 16단 HBM3E는 16단 HBM4 개발·양산에 앞서 자사 칩 적층 기술력을 실험해 본 테스트베드 성격이 크다고 반도체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황 CEO 입김이 세지면서 업계에선 엔비디아 종속에 대한 우려가 함께 커지고 있다. 공급망 다각화를 강조하는 황 CEO 경영 전략에 따라 언제 공급망에서 배제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때 엔비디아와 긴밀한 관계였던 삼성전자는 HBM 퀄테스트(품질검증)를 통과하지 못해 고부가가치 최신 HBM 판매량 확대에 난항을 겪고 있다. AMD 등 엔비디아의 대안을 찾고 있지만 AMD의 AI 반도체와 소비자용 그래픽처리장치 성과가 시장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서 삼성전자 주가도 3개월째 5만원대 박스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