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 TV 긴급 속보를 보면서 AI가 윤석열 대통령을 흉내내고 있는 게 아닐까 했다는 사람들도 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발동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느닷없이 우리의 일상을 내리쳤다. 소동은 유혈 사태 없이 6시간 만에 막을 내렸지만, 12•3 비상계엄 선포의 후폭풍은 전방위적이다.
전세계에 생중계된 무장군인들의 국회 난입으로 수십 년간 힘들게 쌓아올린 민주주의 모범국가 이미지는 속절없이 추락했고 증시와 환율은 직격탄을 맞았다. 외교와 안보에도 구멍이 뚫렸다. 불황으로 가라앉은 내수는 더욱 위축되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으러 간 스웨덴에서 받은 첫 질문은 '계엄'이었다. 비상계엄 사태의 여파가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다. 정치는 역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요인이다. 윤 대통령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마음을 밝혀주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의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삶의 교훈서요 인성 교과서다. <명심보감>은 총 19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치정(治政)편' 제4장은 이런 이야기로 시작된다. "당관자 필이폭노위계(當官者 必以暴怒為戒)." 관직에 있는 자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일은 버럭 화를 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윤석열 정권 출범 초기부터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권부의 핵심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빈번한 대통령 격노설은 "대통령이 뻑하면 화를 내는 성정이구나. 그래서야 누가 감히 쓴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와 부정적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격노 못지않게 윤 대통령에게 따라붙는 연관 검색어가 '음주'다.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에도 술을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술을 자제하기는커녕 과음을 자주 한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잦은 음주는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분노를 촉발한다. 술을 자주 마실수록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화를 내면 낼수록 작은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하는 '분노 중독'에 빠진다. 어느덧 격노와 과음은 윤석열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치정편' 제4장의 다음 이야기를 마저 살펴보자. "아랫사람의 일처리에 못마땅한 것이 있거든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면 마땅히 사리에 맞게 될 것이다. 만약 먼저 화부터 버럭 내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事有不可 當詳處之 必無不中 若先暴怒 只能自害 豈能害人)."
처세의 지혜를 가르치는 책으로 <채근담>과 쌍벽을 이루는 <신음어(呻吟語)>에도 분노를 경계하라는 구절이 있다. "인격이자시화복관(忍激二字是禍福關)." 가만히 참을 것인지, 일시적인 감정에 이끌려 분노를 터뜨릴 것인지,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경계가 갈린다는 얘기다. <신음어>를 저술한 명나라 말기의 관료 여곤은 "최고의 덕성은 침착함과 차분함이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무릇 싸움은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은 윤석열보다 몇 수 위다. 이재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로남불 세계관에 후흑(厚黑)과 안면몰수 화법으로 중무장하고 뱀 같은 냉정함을 견지하며 상대방의 평정심을 뒤흔든다. 걸핏하면 격노하는 다혈질 성정으로는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여의도 대통령 이재명이 입법과 탄핵, 예산 삭감이란 창으로 찌르면 용산 대통령 윤석열이 거부권이라는 방패로 막는 양상이 윤석열 정권 내내 계속되었다. 대선에서 지자마자 냉큼 금뱃지에 당대표까지 꿰차고 사법리스크 방탄을 하는 것도 모자라 거대 의석수를 앞세워 사사건건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잽을 날리는 이재명에 대한 대통령의 분노가 어떠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가랑비에 옷이 젖고 잔펀치에도 충격이 쌓이는 법이다. 게다가 가장 약한 고리가 김건희 여사임을 간파한 민주당의 집요하고 끈질긴 특검 공세는 대통령의 평정심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조선 최고의 사랑꾼'이냐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아내를 철벽 방어하던 대통령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윤•한 갈등'의 뿌리도 김건희 여사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판과 이견을 상당히 불편해 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했다. 도하 각 신문들은 물론이고 일개 무명 논객이 쓰는 본고에서조차 당태종과 위징을 비롯한 중국 고사를 거론하며 주변의 쓴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여러 차례 촉구했을 정도다. 충언을 멀리하고 코드에 맞는 말에만 귀를 여는 태도는 집단 사고와 확증편향에 빠지게 했고, 이는 다시 현실과 동떨어진 과대망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가 시대착오적 비상계엄 선포요 실패한 친위 쿠데타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민주당이 역풍을 우려해 칼집에 넣어둔 채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탄핵'이라는 칼을 거리낌없이 빼들 수 있게 했다. 탄핵으로 인해 가시화된 조기 대선은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고 시간에 쫓기던 대선 후보 1순위 이재명의 고민을 단번에 날려줄 최상의 카드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셈이니 이재명은 복도 많다. 비상계엄을 통해 일거에 판세를 뒤집으려던 윤 대통령의 승부수는 말 그대로 이적수(利敵手)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윤 대통령은 참고 또 참았어야 했다. 때로는 분노가 나의 힘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그 힘이 나를 해친다.
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 직무는 정지됐고 내란죄의 수사 대상이 됐다. 자업자득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법적 기회라도 있지만, 계엄 한파로 삶이 더욱 팍팍해진 국민들은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하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에 씌여 있지만, 그 국민노릇하기 참 힘들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전세계에 생중계된 무장군인들의 국회 난입으로 수십 년간 힘들게 쌓아올린 민주주의 모범국가 이미지는 속절없이 추락했고 증시와 환율은 직격탄을 맞았다. 외교와 안보에도 구멍이 뚫렸다. 불황으로 가라앉은 내수는 더욱 위축되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으러 간 스웨덴에서 받은 첫 질문은 '계엄'이었다. 비상계엄 사태의 여파가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다. 정치는 역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요인이다. 윤 대통령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마음을 밝혀주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의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삶의 교훈서요 인성 교과서다. <명심보감>은 총 19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치정(治政)편' 제4장은 이런 이야기로 시작된다. "당관자 필이폭노위계(當官者 必以暴怒為戒)." 관직에 있는 자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일은 버럭 화를 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윤석열 정권 출범 초기부터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권부의 핵심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빈번한 대통령 격노설은 "대통령이 뻑하면 화를 내는 성정이구나. 그래서야 누가 감히 쓴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와 부정적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격노 못지않게 윤 대통령에게 따라붙는 연관 검색어가 '음주'다.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에도 술을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술을 자제하기는커녕 과음을 자주 한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잦은 음주는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분노를 촉발한다. 술을 자주 마실수록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화를 내면 낼수록 작은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하는 '분노 중독'에 빠진다. 어느덧 격노와 과음은 윤석열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처세의 지혜를 가르치는 책으로 <채근담>과 쌍벽을 이루는 <신음어(呻吟語)>에도 분노를 경계하라는 구절이 있다. "인격이자시화복관(忍激二字是禍福關)." 가만히 참을 것인지, 일시적인 감정에 이끌려 분노를 터뜨릴 것인지,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경계가 갈린다는 얘기다. <신음어>를 저술한 명나라 말기의 관료 여곤은 "최고의 덕성은 침착함과 차분함이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무릇 싸움은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은 윤석열보다 몇 수 위다. 이재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로남불 세계관에 후흑(厚黑)과 안면몰수 화법으로 중무장하고 뱀 같은 냉정함을 견지하며 상대방의 평정심을 뒤흔든다. 걸핏하면 격노하는 다혈질 성정으로는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여의도 대통령 이재명이 입법과 탄핵, 예산 삭감이란 창으로 찌르면 용산 대통령 윤석열이 거부권이라는 방패로 막는 양상이 윤석열 정권 내내 계속되었다. 대선에서 지자마자 냉큼 금뱃지에 당대표까지 꿰차고 사법리스크 방탄을 하는 것도 모자라 거대 의석수를 앞세워 사사건건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잽을 날리는 이재명에 대한 대통령의 분노가 어떠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가랑비에 옷이 젖고 잔펀치에도 충격이 쌓이는 법이다. 게다가 가장 약한 고리가 김건희 여사임을 간파한 민주당의 집요하고 끈질긴 특검 공세는 대통령의 평정심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조선 최고의 사랑꾼'이냐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아내를 철벽 방어하던 대통령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윤•한 갈등'의 뿌리도 김건희 여사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판과 이견을 상당히 불편해 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했다. 도하 각 신문들은 물론이고 일개 무명 논객이 쓰는 본고에서조차 당태종과 위징을 비롯한 중국 고사를 거론하며 주변의 쓴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여러 차례 촉구했을 정도다. 충언을 멀리하고 코드에 맞는 말에만 귀를 여는 태도는 집단 사고와 확증편향에 빠지게 했고, 이는 다시 현실과 동떨어진 과대망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가 시대착오적 비상계엄 선포요 실패한 친위 쿠데타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민주당이 역풍을 우려해 칼집에 넣어둔 채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탄핵'이라는 칼을 거리낌없이 빼들 수 있게 했다. 탄핵으로 인해 가시화된 조기 대선은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고 시간에 쫓기던 대선 후보 1순위 이재명의 고민을 단번에 날려줄 최상의 카드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셈이니 이재명은 복도 많다. 비상계엄을 통해 일거에 판세를 뒤집으려던 윤 대통령의 승부수는 말 그대로 이적수(利敵手)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윤 대통령은 참고 또 참았어야 했다. 때로는 분노가 나의 힘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그 힘이 나를 해친다.
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 직무는 정지됐고 내란죄의 수사 대상이 됐다. 자업자득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법적 기회라도 있지만, 계엄 한파로 삶이 더욱 팍팍해진 국민들은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하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에 씌여 있지만, 그 국민노릇하기 참 힘들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