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도덕경>의 매력에 빠졌다. 5천 글자에 81개 장으로 구성된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사유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다. 구구절절 삶의 지혜가 번뜩인다.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문장에서 눈길이 멈춘다. 머리속에서 많은 생각이 스쳐간다. 고전의 힘이다.
노자가 말한다. "명예와 목숨 중 무엇이 더 중한가? 목숨과 재물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괴로운가? 애착이 클수록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 많이 가지려 할수록 반드시 많이 잃게 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길고 오래 갈 수 있다.(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도덕경> 44장 전문이다. 그 의미를 되새김질하다가 문득 을지문덕 장군과 살수대첩이 떠올랐다. 을지문덕 장군이 7차례나 고의 패전을 거듭하며 수나라 대군을 평양성 부근까지 깊숙이 끌어들인 후 적장 우중문에게 오언시 한 수를 보냈다. 이름하여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헤아림은 땅의 이치마저 통달했네.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할 줄 알면 이제 그만 멈춤이 어떠한가."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髙 知足願云止)
그제서야 계략에 빠졌음을 깨닫고 서둘러 퇴각하던 30만 5천의 수나라 정예 별동대는 추격해 온 고구려 군대에 의해 살수(청천강)에서 괴멸되다시피 했고, 요동 지역까지 살아 돌아간 자가 2,700명에 불과했다.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살수대첩은 고수(高隋)전쟁을 종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후한(後漢) 이후 사분오열된 대륙을 수백 년 만에 통일한 초강대국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결정적 전투였다. 살수대첩은 침략을 받은 역사로 점철된 우리 민족사에서 가슴을 뛰게 하는 몇 안 되는 장면 중 하나다. 단재 신채호가 을지문덕을 우리 민족사 최고의 인물로 꼽은 이유일 것이다.
<도덕경> 44장과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 후반부가 묘하게 닮았다. 을지문덕도 <도덕경>을 읽고 응용한 것일까? 역사에는 <도덕경>이 당나라 때 고구려에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일찌기 4세기 중엽부터 고구려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니 을지문덕이 활약하던 7세기 초엽이면 이미 식자층에 알음알음 보급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소수림왕 때인 서기 372년, 고구려는 한반도 최초로 불교를 받아들였고 태학과 경당을 설치하여 유교 교육을 실시했다.) 한시를 격식에 맞게 지을 정도의 학식을 겸비한 을지문덕 장군이라면 <도덕경>을 읽고도 남았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4세기 후반 백제 근구수왕의 휘하 장수 막고해 역시 <도덕경>의 그 구절을 인용했다고 전한다.
노자의 가르침과는 달리 사람은 대개 만족할 줄 모르고 적당할 때 멈출 줄 몰라 욕을 보고 자기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기 일쑤다. 정치브로커 명태균과 한 묶음으로 엮여 요즘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김영선 국민의힘 전 의원의 처지가 딱 그렇다. 5선에 당대표까지 역임한 정계 중진이 금뱃지 또 달 욕심에 눈이 먼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매달 세비 절반을 명태균에게 뜯기고 국회의원이 아닌 바지사장으로 비유되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한 끝에 동반 구속까지 됐으니 말이다.
명태균이 일으킨 파문이 일파만파, 급기야 게이트로 진화했다. 2022년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 공천 개입뿐만이 아니라 국정 개입, 인사 청탁 등 각종 의혹이 권력 내부를 향하여 번지고 있다. 자고 나면 새로운 녹음 파일이 등장한다. 명태균과 강혜경이 연출하는 폭로 이중주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파도 파도 끊임없이 뉴스거리를 제공하는 김건희 여사는 저마다 한가락씩 하는 출연진 가운데에서도 단연 주연급 활약상을 보여준다. 대통령도 김여사 앞에서는 조연에 불과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전 국민 트라우마가 된 '국정농단' 네 글자가 또다시 아른거린다.
정부여당에 김건희 리스크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늪이라면 거대 야당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당 대표 이재명의 사법리스크다. 비록 김영선 전 의원처럼 구속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김건희 여사나 이재명 민주당 대표나 살얼음판을 딛고 서있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신세다. 한쪽의 리스크로 인한 반사이익을 다른 한쪽의 리스크가 상쇄시킨다. 여야가 서로의 리스크로 연명하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됐다.
누구보다도 <도덕경>을 읽고 가슴에 새겨야 할 사람들은 정치인과 그 가족들 아닌가 싶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것이라는 노자의 가르침 '지족불욕, 지지불태'는 가진 것이 많음에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구다. 거대 의석수를 앞세워 막무가내 입법과 묻지마 탄핵, 분풀이성 예산 삭감 등 의회독재를 방불케하는 힘자랑에 도취되어 윤석열 정권에 실망한 사람들의 마음을 흡수하지 못하는 민주당도 이쯤에서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권력이 클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잃을 것이 많을수록 멈춤의 지혜가 필요하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노자가 말한다. "명예와 목숨 중 무엇이 더 중한가? 목숨과 재물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괴로운가? 애착이 클수록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 많이 가지려 할수록 반드시 많이 잃게 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길고 오래 갈 수 있다.(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도덕경> 44장 전문이다. 그 의미를 되새김질하다가 문득 을지문덕 장군과 살수대첩이 떠올랐다. 을지문덕 장군이 7차례나 고의 패전을 거듭하며 수나라 대군을 평양성 부근까지 깊숙이 끌어들인 후 적장 우중문에게 오언시 한 수를 보냈다. 이름하여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헤아림은 땅의 이치마저 통달했네.
만족할 줄 알면 이제 그만 멈춤이 어떠한가."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髙 知足願云止)
그제서야 계략에 빠졌음을 깨닫고 서둘러 퇴각하던 30만 5천의 수나라 정예 별동대는 추격해 온 고구려 군대에 의해 살수(청천강)에서 괴멸되다시피 했고, 요동 지역까지 살아 돌아간 자가 2,700명에 불과했다.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살수대첩은 고수(高隋)전쟁을 종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후한(後漢) 이후 사분오열된 대륙을 수백 년 만에 통일한 초강대국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결정적 전투였다. 살수대첩은 침략을 받은 역사로 점철된 우리 민족사에서 가슴을 뛰게 하는 몇 안 되는 장면 중 하나다. 단재 신채호가 을지문덕을 우리 민족사 최고의 인물로 꼽은 이유일 것이다.
<도덕경> 44장과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 후반부가 묘하게 닮았다. 을지문덕도 <도덕경>을 읽고 응용한 것일까? 역사에는 <도덕경>이 당나라 때 고구려에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일찌기 4세기 중엽부터 고구려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니 을지문덕이 활약하던 7세기 초엽이면 이미 식자층에 알음알음 보급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소수림왕 때인 서기 372년, 고구려는 한반도 최초로 불교를 받아들였고 태학과 경당을 설치하여 유교 교육을 실시했다.) 한시를 격식에 맞게 지을 정도의 학식을 겸비한 을지문덕 장군이라면 <도덕경>을 읽고도 남았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4세기 후반 백제 근구수왕의 휘하 장수 막고해 역시 <도덕경>의 그 구절을 인용했다고 전한다.
노자의 가르침과는 달리 사람은 대개 만족할 줄 모르고 적당할 때 멈출 줄 몰라 욕을 보고 자기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기 일쑤다. 정치브로커 명태균과 한 묶음으로 엮여 요즘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김영선 국민의힘 전 의원의 처지가 딱 그렇다. 5선에 당대표까지 역임한 정계 중진이 금뱃지 또 달 욕심에 눈이 먼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매달 세비 절반을 명태균에게 뜯기고 국회의원이 아닌 바지사장으로 비유되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한 끝에 동반 구속까지 됐으니 말이다.
명태균이 일으킨 파문이 일파만파, 급기야 게이트로 진화했다. 2022년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 공천 개입뿐만이 아니라 국정 개입, 인사 청탁 등 각종 의혹이 권력 내부를 향하여 번지고 있다. 자고 나면 새로운 녹음 파일이 등장한다. 명태균과 강혜경이 연출하는 폭로 이중주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파도 파도 끊임없이 뉴스거리를 제공하는 김건희 여사는 저마다 한가락씩 하는 출연진 가운데에서도 단연 주연급 활약상을 보여준다. 대통령도 김여사 앞에서는 조연에 불과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전 국민 트라우마가 된 '국정농단' 네 글자가 또다시 아른거린다.
정부여당에 김건희 리스크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늪이라면 거대 야당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당 대표 이재명의 사법리스크다. 비록 김영선 전 의원처럼 구속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김건희 여사나 이재명 민주당 대표나 살얼음판을 딛고 서있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신세다. 한쪽의 리스크로 인한 반사이익을 다른 한쪽의 리스크가 상쇄시킨다. 여야가 서로의 리스크로 연명하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됐다.
누구보다도 <도덕경>을 읽고 가슴에 새겨야 할 사람들은 정치인과 그 가족들 아닌가 싶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것이라는 노자의 가르침 '지족불욕, 지지불태'는 가진 것이 많음에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구다. 거대 의석수를 앞세워 막무가내 입법과 묻지마 탄핵, 분풀이성 예산 삭감 등 의회독재를 방불케하는 힘자랑에 도취되어 윤석열 정권에 실망한 사람들의 마음을 흡수하지 못하는 민주당도 이쯤에서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권력이 클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잃을 것이 많을수록 멈춤의 지혜가 필요하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