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상무부 산업안보국은 지난 2일 수출통제 대상 품목에 특정 고대역폭메모리(HBM) 제품을 추가한다고 관보를 통해 발표하였다. 동 조치는 인공지능(AI)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핵심 부품인 HBM의 중국 수출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은 우리의 적들이 우리의 기술을 우리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중대한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미국이 통제한 것은 제품이지만 그 실체는 기술임을 주목해야 한다.
지난 2018년 7월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기술과 지식재산권을 절취해 온 중국의 광범위한 불공정 행태를 이유로 340억 달러 규모의 중국 수입 물품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중간 관세전쟁이 촉발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미·중간 무역협상이 결렬된 2019년 5월 트럼트 대통령은 중국의 화웨이 등을 미국 기업의 기술 및 기술 상품의 대중 수출통제 대상 리스트(Entity List)에 등재함으로써 사실상 미·중간 기술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후 엔티티 리스트(Entity List) 등재 중국 기관들이 계속 추가되어 작년에 640여 개에 달하였고, 지난 2일 중국의 군 현대화와 연관된 140개 기업이 추가 등재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의 대중 기술 통제는 ‘핵심·신흥기술(CET)’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 기술 리스트는 미 백악관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선정하고, 기술 변화 등에 따라 리스트를 변경한다. 2024년 리스트는 총 19개 대상 분야에 120여 개 세부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AI, 양자컴퓨팅, 나노 제조, 극초음속 시스템, 5G/GG, 사이버 보안, 차세대 반도체, 자율 무기 시스템 등의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첨단기술이거나 미래 기술이다. 또한 첨단 무기 제조에 활용될 수 있어 국가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술들이다.
한편, 미국은 2023년 5월 발표한 '핵심·신흥기술 국가표준전략' 보고서를 통해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이 자국의 군사산업 정책 및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제표준 개발, 특히 핵심·신흥기술에 대한 국제표준 개발에 있어 기술적 장점과 관계없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는 미국의 경제·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핵심·신흥기술의 국제표준 개발에 있어 자유 민주 세계의 가치와 원칙을 위협하는 국가들의 활동에 적극 대응할 것이고 나아가 동맹국 및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의 연대와 협력을 강화할 것임을 밝혔다. 이와 관련 미국의 국가표준화전략에서는 특히 국제표준개발에 있어 8대 핵심·신흥기술과 6개 핵심·신흥기술 응용분야를 콕 집어 중국에 대한 견제를 집중할 것임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AI, 양자정보, 반도체, 통신네트워킹, 디지털 신분증 그리고 사이버 보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사실상 표준 안보를 표방한 것이다. 이로써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 기술 전쟁 선포 이후 취해 온 일련의 다양한 형태의 대중 경제 안보 조치가 표준 안보를 통해 완전체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가 왜 표준개발을 경제·국가안보 관점에서 대응하고자 선언하였을까? 미 상무부가 실시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무역의 최대 93%가 표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즉, 표준이 통상 협상과 기술 분쟁의 새로운 전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과 미국은 국제 표준 제도에 대한 영향력을 추구하고 있으며, 표준을 설정하는 데 있어 미국이나 중국의 영향력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술 패권과 연관된 기술, 경제 및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국가적 관점에서 표준은 핵심·신흥기술에 대한 기술 숙달과 거대한 무역 및 재정적 이득의 잠재력을 가진 시장의 통제를 포함한다. 나아가 군사적 리더십은 첨단 기술과 경제적 역량에 의존하기 때문에 국가 안보 문제와도 직결된다. 민간 및 군사 분야 모두에 활용될 수 있는 이중 용도로 사용되는 기술들이 그 사례이다. 여기에는 AI, 암호화, 드론, 로봇 및 반도체 기술 등 첨단기술이 모두 포함된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국제 표준화 활동이 더 이상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자국에 이로운 표준을 채택하기 위한 경쟁의 장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국가들의 국제 표준화 활동 참여도를 보여주는 지표들을 보면 중국과 미국의 행보가 크게 상반되는 점이 주목된다. 하나는 대표적인 국제표준화기구(ISO) 내 기술위원회(TC) 및 분과위원회(SC)의 표준화 작업을 주도하는 간사국 숫자가 중국이 WTO에 가입한 2001년과 2020년 기준 미국은 136개에서 103개로 줄었는데 중국은 불과 6개에서 66개로 무려 11배가 증가하였다. 다른 지표로서 ISO 내 TC 및 SC 산하에 특정 표준개발을 위해 구성된 작업반(WG)에서 의장 역할을 하는 컨비너 숫자의 국별 추이를 보면, 미국은 471명에서 427명으로 감소하였음에 비해 중국은 13명에서 무려 215명으로 18배가 증가하였다. 이는 미국이 민간의 수많은 표준화 기관이 참여하는 시장을 통해 최고의 표준을 개발하는 시스템임에 비해 중국의 표준화 과정은 정부 주도하에 이뤄지고 있음에 주로 기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 안보와 경제적 이득을 수반하는 핵심·신흥기술에 대한 중국의 불공정한 추격이 심화되면서 미국이 입장을 급선회하였다. 미국은 2023년 국가표준화전략을 통해 국제표준화 활동에서 미국의 리더십 강화와 동맹국 및 파트너와의 협력을 통한 국가 안보 보호를 제시한 것이다. 특히, 미국 정부는 AI, 디지털 및 양자 기술에서의 대중 통제를 최우선 관심 분야로서 설정하였다. 이는 이들 핵심 기술 분야에서는 미국과 중국 간의 기술 생태계를 사실상 양분(decoupling)할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로서는 기존의 무역 및 투자안보 이외에 표준안보에 기반한 새로운 표준 질서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학박사 △한국공정무역법학회 이사 △산업연구원 감사실장 △산업연구원 국제산업협력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