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일도 없는 용준(홍경 분). 빈칸 많은 이력서를 보는 게 일상이 된 그는 엄마(정혜영 분)의 잔소리에 못 이겨 가게 일을 돕는다.
도시락 배달 중이던 용준은 수영장에서 완벽한 이상형인 여름(노윤서 분)과 맞닥뜨린다. 청각장애인 수영선수인 동생 가을(김민주 분)이 올림픽 무대에 서는 것만이 목표였던 여름은 용준으로 인해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된다. 가을은 용준으로 인해 변화하는 여름을 보며 두 사람을 응원한다. 그러나 여름은 왜인지 용준을 밀어내려 하고 두 사람의 오해는 깊어진다.
영화 '청설'은 지난 2010년 국내 개봉했던 동명 대만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말할 수 없는 비밀'과 함께 대만 청춘 로맨스 붐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태생적으로 다른 영화보다 표현 방식에서 어려움이 많은 작품이지만 '청설'은 부족하거나 모자람 없이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든다. 대사나 목소리의 힘에 기대지 않고 인물의 눈빛, 표정, 손짓 등 작은 변화와 움직임에 반응하게 된다. 자극적인 상황이나 큰 사건이 없어도 온 감각을 집중시키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작은 단위의 감각들을 온몸으로 느끼고 빠져드는 순간이 시네마틱하다.
또 영화가 가진 담백하고 무해한 태도도 매력적이다. 차별이나 혐오 없이 이들을 마주하고 일상적으로 대하고자 한다. 청춘들의 고민과 갈등, 사랑과 성장에 집중하고 손끝으로 매만지듯 섬세하게 톺아내는 과정이 건강하게 느껴진다.
수어를 진중하게 다룬다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수어의 세계를 본격적이나 일상적으로 다루며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수어의 일부로 쓴다. 발화뿐만 아니라 눈빛, 표정도 수어임을 전하고 이들의 대화를 깊이 있게 다룬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크랭크인 전부터 수어를 익힌 주연 배우들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배우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실제 20대로 구성된 배우 라인업 덕에 인물들의 고민과 현실이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신선하고 낯선 조합이 빚어내는 호흡이나 분위기도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다.
극 중 홍경은 자신의 장기를 십분 활용해 관객의 마음을 허문다. 판타지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용준을 현실에 발붙이도록 만들었다. 그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느끼는 설렘, 기대, 아픔이 관객에게도 생생히 전달된다. 관객들에게 용준을 설득하는 과정이 인상 깊다. 극 중 여름을 연기한 노윤서는 용준이 그에게 흠뻑 빠지게 된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말간 인상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용준의 마음이 되고 만다. 가을 역을 맡은 김민주도 눈여겨봐야 할 배우다. 청각장애인 수영선수 가을의 상황과 감정을 관객이 가깝게 느껴질 수 있게끔 표현했다. 스크린 데뷔작임에도 겁먹거나 주춤하는 구간 없이 밀고 나가는 힘이 대단하다.
아쉬운 점들도 있다. 주요 갈등이 해결된 말미부터는 급격히 설명적이고 마무리를 위해 소모된다. 여기에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음악과 음향이 과잉되어 물밀듯 밀려든다. 영화 초반부터 말미까지 점진적으로 쌓아간 감정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청설'이 주는 여운이 깊다. 2000년대 초반 한국 로맨스 영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시네마적인 순간을 안겨준다. 섬세하고 고운 감정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귀하다. 배우 홍경, 노윤서, 김민주의 호흡이 아름답고 이들의 발견은 훗날 영화계 자산처럼 남겠다. 11월 6일 극장 개봉 하며 러닝타임은 109분 관람 등급은 전체관람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