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지. ‘노래를 잘하니까, 하느님 곁에서 노래 부르라고 일찍 데려가셨나보다’ 그렇게 생각했지. 내가 천주교 신자인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도 있잖아요.” -고(故) 이대봉 회장, 2010년 신동아 인터뷰 중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이 1일 밤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1987년 고인의 막내아들 이대웅 군이 학교 폭력으로 사망한 비극은 그의 삶의 관점을 바꾸는 계기됐다. 당시 서울예고 2학년이었던 이 군은 점심시간 선배들에 의해 학교 야산으로 끌려가 배를 두 차례 맞은 뒤 유명을 달리했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한 그는 처음에는 격노했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겠다는 일념으로 가해자에 대한 구명운동에 나섰다.
당시 고인은 막내 아들처럼 예술에 재능이 있는 꿈나무를 육성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2010년 사재 200억원을 털어 도산 위기에 처한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를 인수해 학교법인 서울예술학원 이사장에 오르며 세상을 놀래킨 이유다. 이어 서울 평창동에 서울예고 개교 70주년을 맞아 ‘서울아트센터’도 설립했다.
그의 장학사업은 국경을 넘었다. 소년·소녀 가장에 대한 후원을 비롯해 중국과 베트남에서 해외 사업을 펼치면서 중국의 독립운동가 후손들, 베트남의 공안열사(참전용사) 유자녀 및 소수민족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1941년 12월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를 일군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6.25 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아버지가 전재산을 잃자, 고등학교 1학년 때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농사, 신문배달에 이어 고물상, 부두하역장, 비료공장 등에서 온갖 잡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렇게 어렵게 모은 돈으로 1975년 동아항공화물㈜을 세웠고, 참빛가스산업, 참빛동아산업 등 여러 계열사를 이끄는 알짜 기업으로 키웠다. 베트남 호텔, 골프장 사업에도 진출했다.
고인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이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국내 기업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외국에 진출해 달러를 벌어들여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