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4일 열린 파리올림픽 육상 남자 1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노아 라일스 선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광팬으로 유명하다. 우승 후 성조기를 두른 채 일본 애니메이션 '드래곤볼'에 나오는 손오공의 '에네르기파' 포즈를 취하자 일본 언론들은 그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오타쿠(광팬)'라고 부르며 화답했다.
지금 일본에선 콘텐츠 산업을 향한 정부와 기업의 시선이 뜨겁다. 일본에서 탄생한 캐릭터와 게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창작자층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많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콘텐츠 산업 부흥을 위한 일본의 민관 협력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일본발 캐릭터와 게임이 세계에 침투하고 있다"면서 "혁신 기술을 살려 글로벌화하면 일본 경제를 떠받치는 기간산업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일본 정부 자료에 따르면 일본 콘텐츠 수출 규모는 연간 4조7000억엔(약 43조원)으로 반도체(5조7000억엔), 철강(5조1000억엔)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일본에선 콘텐츠 산업 발전을 위한 시책들이 성공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낸다면 수출액 13조엔(약 119조원)에 달하는 자동차를 능가하는 존재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콘텐츠 산업에 거는 기대가 유독 큰 것은 세계에서도 뒤처져 있는 디지털 산업의 적자를 메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일본의 디지털 분야 국제수지 적자는 지난해 5조5000억엔(약 50조4700억원)으로 5년 만에 2배로 증가했다. 일본의 정보기술(IT) 기반이 비교적 낙후된 가운데 클라우드 서비스, 인터넷 광고 등으로 해외에 지불하는 금액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산업성 관계자는 닛케이에 콘텐츠 산업의 미래성을 강조하면서 "디지털 적자를 만회할 수 있는 카드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일본 내각부가 작성한 올해 경제재정백서에도 "디지털 적자가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며 "콘텐츠 산업 등 우리나라(일본)의 잠재적 성장 분야에서 벌어들일 수 있는 힘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콘텐츠 산업에도 다양한 분야가 존재하는데 사실 일본은 세계시장에서 영화와 드라마는 한국에, 스마트폰 게임에서는 중국에 뒤처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닛케이는 "국내 시장에 안주하다 보니 글로벌 진출이 늦어져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여전한 과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은 영화 및 드라마로 대표되는 한국 콘텐츠 산업의 국제적 위상에 대해 '한국 정부가 나서서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질투 어린 분석을 내놓곤 한다. 그러던 일본도 이제는 정부가 적극 나서서 콘텐츠 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지난 4월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참석한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 회의'에는 '만비키 가족'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고질라-1.0'으로 미국 아카데미상 시각효과상을 수상한 야마자키 다카시 감독이 자리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일본 영화의 위기에 대해 호소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한국에는 민관이 하나가 된 지원 체제가 있다"며 이 같은 환경에서 만들어진 작품들과 맞서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야마자키 감독은 "지원을 하려고 해도 전문가가 없는 것이 문제"라며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일본 정부가 6월 내각회의에서 결정한 경제재정 운영 및 개혁 기본방침, 일명 '호네부토(骨太·굵은 뼈대)' 방침에는 '콘텐츠 산업의 해외 진출'이라는 항목이 신설됐다. 또한 신자본주의 실행계획에는 '콘텐츠'라는 문구가 80회 이상 등장했다.
현재 일본은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전 세계 시청자 동향을 조사하는 미국 패럿 애널리틱스(Parrot Analytics)의 '글로벌 TV 디맨드 어워즈(Global TV Demand Awards)'에서 지난해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를 얻은 TV 프로그램으로 선정된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주술회전'이었다. 2021년에는 '진격의 거인'이 선정됐다. '최애의 아이'와 '귀멸의 칼날'도 해외에 진출해 성과를 거뒀다.
일본영상협회에 따르면 해외 수요를 포함한 일본의 2022년 애니메이션 산업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7% 증가한 2조9277억엔(약 27조원)에 달했다. 다만 시장은 확대되고 있지만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지탱되는 구조는 변함이 없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콘텐츠 산업에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7월 애니메이션과 게임 사업자를 대상으로 AI 도입 사례 등을 소개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AI를 활용하는 사업자에 대한 보조금 지원도 검토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