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사우디 긴밀한 네트워크···SK이노 초석 다져
1일 재계에 따르면 SK그룹 핵심 계열사는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SK하이닉스로 꼽힌다. 세 회사는 각각 정유·통신·반도체 사업을 영위하며 매출·영업이익과 시가총액 면에서 SK그룹의 핵심 축 역할을 하고 있다.
세 회사는 SK가 만든 기업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정유·통신·반도체 기업을 SK가 인수한 후 집중 투자해서 키운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재계에서 SK그룹이 인수합병에 많은 공을 들인다는 인식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SK그룹 정유 사업 토대를 닦은 인물은 최종현 선대회장이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정부는 중동에서 원유를 수급하기 어려워지자 민관 합작회사인 대한석유공사(유공) 민영화를 추진했고, 중동과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선경그룹(현 SK그룹)이 관련 지분을 매입함으로써 오늘날 SK이노베이션의 토대를 닦았다.
업계 관계자들은 당시 정부가 유공 민영화를 추진한 이유는 2차 오일쇼크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중동에서 원유를 수급하기 어려워진 것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1980년 5월 최규하 전 대통령이 직접 사우디를 방문해 양국 간 경제협력을 논의한 뒤 공동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공동성명에는 한국과 사우디는 석유 분야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고 사우디는 한국에 석유 공급을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2차 석유파동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 수출을 줄인 상황에서 관련 수입 쿼터를 확보함으로써 에너지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이때 한국과 사우디 간에 가교 구실을 한 인물이 최 선대회장이다. 김재열 SK그룹 고문(전 동반성장위원장 부회장)은 "최 전 대통령이 사우디에 방문해 당시 OPEC에서 핵심 역할을 하던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 전 사우디 석유장관(석유상)을 만났다"며 "야마니 석유상은 친분이 있던 최 선대회장을 함께 찾았다"고 술회했다.
최 선대회장은 석유산업의 중요성을 고려해 야마니 석유상과 관계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야마니 석유상도 최 선대회장과 국제 정세에 관한 심도 있는 토론을 하는 등 최 선대회장 의견을 경청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야마니 석유상은 두 번이나 사우디의 석유 쿼터를 한국에 제공했다.
이때 사우디와 긴밀하게 다져 놓은 협력관계가 SK그룹 정유사업의 핵심 토대가 됐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김 고문은 "유공 민영화 당시 SK그룹이 TF(태스크포스)를 꾸려 지원했고 아마니 석유상이 이를 적극 지원했다"며 "중동과 구축한 긴밀한 네트워크를 토대로 SK그룹이 유공 인수 적격자라는 결론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는 유공 인수는 최 선대회장과 사우디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이뤄낸 성과이며 노태우 전 대통령이 SK그룹에 맡기라고 했다는 일각의 주장과 반대되는 증거다.
이후 SK그룹은 인천정유 등을 지속해서 인수합병하며 한국 1위 정유업체로서 입지를 다졌다.
YS정부 시절 한국이동통신 지분 인수···"통신이 미래, 꼭 해야"
SK그룹 통신사업 진출과 성장을 주도한 인물은 최 선대회장에게 그룹 경영을 물려받은 최태원 회장이다.
1992년 4월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공기업 중심이던 이동통신시장에 민간사업자를 참여시켜 경쟁을 활성화한다는 제2 이동통신사 계획을 발표했다. SK그룹을 포함한 7개 기업이 참가했으며 최종적으로 SK그룹이 적격 사업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SK그룹은 최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결혼으로 노 전 대통령 사돈 기업으로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에 직면했고 의혹 해소를 위해 사업권을 자진 반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1994년 제2 이통사 선정이 다시 진행됐고 이번에는 포스코그룹이 선정되어 신세기 이동통신을 설립했다.
그룹 미래 먹거리로 통신 사업을 낙점한 SK그룹은 정권이 바뀐 이후인 1994년 YS정부의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방침에 따라 진행된 공개 입찰을 통해 한국이동통신 경영권을 확보했다. 이후 1997년 회사 이름을 SK텔레콤으로 바꿨다.
재계 관계자는 SK그룹이 통신 사업에 진출한 것은 노 전 대통령과 사이가 나쁜 YS정부 시절이었으며 정경유착으로 이동통신 사업권을 얻었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당시 SK그룹은 한국이동통신 지분 23%를 공개 입찰로 사들이기 위해 약 4271억원을 투자했다. 주당 약 1만5000원 선이었던 한국이동통신 지분을 주당 약 32만원을 주고 사들이며 20배에 달하는 프리미엄을 더했다. 당시 언론에선 정부가 SK그룹에 바가지를 씌운 것 아니냐는 지적마저 나왔다.
이동통신시장 성장에 강한 확신이 있었던 최 회장의 결단이 없었다면 이러한 SK그룹의 결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김 고문은 설명했다.
김 고문은 "최 회장은 1988년 결혼 후 시카고대에 다니면서 미국 실리콘밸리에 자주 방문했다"며 "이때 정보통신산업의 변화를 체감하고 향후 휴대폰(모바일)과 관련 소프트웨어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이에 최 회장은 국내에서 불모지였던 이동통신 관련 기술을 독학으로 공부하며 이동통신 사업의 높은 성장성을 직감했다.
최 회장의 강한 의지를 토대로 SK그룹은 1992년 김 고문을 중심으로 제2 이통사 TF를 꾸렸고 포스코·LG그룹을 제치고 사업권을 따냈다. 하지만 김영삼 당시 대통령 후보가 특혜 우려가 있다고 지적함에 따라 눈물을 머금고 사업권을 반납해야만 했다.
이후 최 회장 주도로 SK그룹은 다시 한국이동통신 인수에 나서 SK텔레콤을 만들었고, 2001년 경영난에 처한 신세기 이동통신을 인수하며 오늘날 1등 이동통신 사업자라는 입지를 다졌다.
김 고문은 "(통신 사업은) 최 회장이 무조건 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며 "노 전 대통령의 도움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만큼 특혜 의혹은 말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각에서 주장하는)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유입설도 터무니없다"며 "SK그룹은 당시 현금만 3000억원을 들고 있는 등 유동성이 풍부했다"고 지적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이 SK그룹으로 유입됐다는 일각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하이닉스 인수·육성으로 빅테크와 어깨 나란히···AI 플랫폼 승부수
선대회장의 DNA는 최태원 회장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며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2011년 이동통신 사업으로 확보한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투자해 메모리 치킨게임으로 힘에 겨워하던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해서 SK하이닉스로 재편했다. 정유·통신이라는 내수 중심 사업을 영위하던 SK그룹은 반도체라는 수출 중심의 사업에 진출했고, 하이닉스반도체는 호황기와 침체기가 반복되는 사이클 사업을 영위하면서 어려운 시기에 자금을 지원해 줄 든든한 뒷배를 얻었다.
이후 최 회장은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플래시 사업부(솔리다임) 인수를 승인·지원하며 기업용(B2B) 낸드 시장에 약하다는 기존 이미지 해소에도 나섰다.
상호 윈·윈이라는 평가를 받은 SK그룹의 하이닉스반도체 인수는 올해 HBM(고대역폭 메모리)과 기업용 SSD(eSSD)가 중심이 되는 인공지능 메모리 시대가 열리면서 큰 결실을 거뒀다. SK하이닉스는 올해와 내년 2018년 반도체 슈퍼사이클(대호황)을 넘어서는 매출과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매출·영업이익과 시가총액 면에서 정유·통신 계열사마저 넘어서며 'SK그룹=AI 반도체 기업'이라는 인식을 전 세계에 확고히 했다.
이제 재계에선 인수합병의 귀재 최 회장의 다음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최 회장은 SK그룹이 인수합병으로 확보한 정유(에너지), 통신, 반도체와 적극적인 투자로 진출한 배터리(이차전지) 사업을 결합한 AI 인프라 기업이 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골드러시 시대에 돈을 번 청바지와 곡괭이 판매상처럼 SK그룹이 AI 시대에 AI 서비스 제공에 필요한 인프라(AI 데이터센터)를 제공함으로써 글로벌 빅테크에 버금가도록 사세를 키우겠다는 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