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출생률이 0.72까지 떨어졌다는 소식은 일본에서도 크게 보도됐다. 그런데 저출산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세계 선진국들의 공통적인 문제다. 일본의 출생률은 1.26으로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수준이라는 2.1에 턱없이 못 미치는 상황이고 개선될 기미 또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일본에서는 최근 ‘소멸 가능성’이 있는 지자체가 일본 전국 지자체 1729곳 중 744곳으로 전체의 40% 이상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화제다. 민간단체인 ‘인구전략회의’가 2020년부터 2050년까지 30년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중심 연령대인 20~39세 여성들이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지자체를 ‘소멸 가능성’이 있는 지자체로 분류한 통계 분석결과다.
10년 전인 2014년에도 동일한 분석을 실시했는데, 그때 ‘소멸 가능성’ 지자체가 896곳이었기 때문에 다소 개선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소멸’이라는 강렬한 용어가 주는 충격과 함께 역시 실감되는 위기감 때문인지 일본의 저출산 문제 대책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한때 저출산 문제를 여성만의 문제인 것처럼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정체되는 일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내건 슬로건의 하나로 '모든 여성이 빛나는 사회 만들기'라는 것이 있는데, 여성이 집안일이나 육아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 진출에 나설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얼핏 여성의 지위 향상을 지향하는 듯한 슬로건으로 보이지만 '여성이 빛난다'는 말에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일본 사회가 정체되어 있는 것은 여성이 빛나지 않았기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고 해도 여성이 빛나지 못하게 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애초에 여성이 빛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육아를 잘 도와줘라'는 격려(?)의 말을 들었다. '도와준다'는 말에 나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는데, 돌이켜보니 그때 그런 말을 자주 들었던 것은 당시 ‘이쿠맨’이 인기를 끌었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잘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참고로 한국에도 ‘육아빠’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실제로 쓰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또한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말로 ‘원 오페(ワンオペ)’라는 게 있다. ‘원맨 오퍼레이션(혼자 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혼자서는 도저히 하지 못할 일들을 짊어져야 하는 가혹한 상황을 말하는 것인데 ‘원 오페 육아’라는 식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전업주부의 육아도 ‘원 오페’의 연속이지만 일하는 엄마가 되면 그 가혹함이 가중된다. 그런데 ‘원 오페 육아’ 문제는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처럼 여겨져서 남성에게는 이 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다만,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일본이나 한국이나 도토리 키재기며, 어느 쪽이 더 나은지를 겨루어봤자 의미가 없다. 남성의 육아휴직 취득률 등을 봐도 일본이나 한국이나 너무 낮아서 아직 갈 길이 멀고,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좌우하는 정책 결정 과정에 여성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기 어려운 상황은 일본과 한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2023년 세계 젠더갭 지수 순위를 살펴보면 한국(105위)보다 일본 순위(125위)가 낮다. 아직 일부지만 한국에서 도입된 국회의원 선거의 여성 후보 쿼터제는 일본에 아직 도입되지 않았고, 여성 국회의원 비율도 일본(10.3%, 세계 164위)보다 한국(19.1%, 세계 120위)이 높다(2023년 1월 기준). 그러나 젠더를 둘러싼 문제가 한·일 모두에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고, 그것이 저출산 문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출산 문제는 물론 여성만의 문제도 아니고 젠더를 둘러싼 문제만도 아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저출산의 근본적인 원인은 젊은이들 삶의 고단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한국 사회의 이런 상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88만원 세대, ‘헬조선’ ‘수저계급론’ ‘N포 세대’와 같은 말들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제적 격차 문제나 젊은이들의 취업·생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국 대학에서 12년간 학생을 가르치며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 있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 학교 성적이 취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학생들은 성적에 매우 민감했다. 집에서 그냥 푹 자고 쉬면 나을 것 같은 몸살이나 감기 정도에도 굳이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갖고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학생과 성적 차이가 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여학생이 생리통 진단서를 제출했을 때는 사실 놀랐다.
학생들은 그런 것을 하나하나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나는 출결이나 몇 분 지각만으로 성적이 결정되는 수업이 과연 대학의 수업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출결만으로 점수 차이가 날 것 같은 성적평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출결 하나에도 필사적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한 대학 공부일까 하는 회의감을 느낀 적이 적지 않다. 본래 공부하기 위해서 다니는 학교를 ‘공부하기 위해’ 휴학한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취업을 위해서는 대학 성적에 더해 ‘스펙’이 있어야 하니 대학 공부는 제쳐두고 학원을 다니며 우선 스펙을 쌓겠다는 것이다. 대학이 취업에 관련된 공부를 제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저 ‘대졸’이라는 자격증을 발급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취업을 위해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일분일초의 지각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지만 한편 만족스러운 취업이 결정되면 당당하게 '취업이 결정돼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에 출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말이다. 취업이 결정됐으니 당연히 졸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회 분위기가 학생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좋은 고등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격해지는 입시경쟁 완화를 위해 도입된 고교 평준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경제 격차와 교육 격차를 발생시켜 외고나 자율고와 같은 특목고, 심지어 일부 대안학교까지 단순한 엘리트 고등학교로 만들어버린 것 같다. 수능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가혹한 입시제도에 다양성을 가져오려고 한 수시전형과 같은 선택지 또한 경제 격차에 따른 불공평감을 낳고 있다. 젊은이들을 둘러싼 환경은 점점 더 치열한 경쟁 속으로 그들을 등 떠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2년 전 19년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일본에 돌아왔다. 일본에 살면서 감동을 느낀 일상의 풍경이 있다. 다름 아닌 동네 공원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평일 오후에 공원에서 축구나 캐치볼을 하면서 뛰어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도 집에 가는 길에 공원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학원에 쫓기지 않는 아이들의 일상이 여기에는 아직 존재하는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도 ‘입시전쟁’이라고 불리는 가열된 대학교 입시가 논쟁거리가 됐던 때가 있었다. 최근에는 도쿄를 중심으로 중·고등학교 입시가 과열되고 있다는 보도를 자주 접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한국과 비교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일본에서는 아직 그 경쟁을 못 본 체하겠다는 선택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입시경쟁의 가열은 어디까지나 일부며, 적어도 거기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남아 있다.
일본 학교에는 ‘부카쓰(부활동)’라는 일종의 동아리 활동 문화가 있다. 방과 후나 휴일을 이용해서 자발적으로 교내에서 활동한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자신이 좋아하는 ‘부’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이 지극히 전형적인 중·고등학생의 모습이다. 정규 교육과정이 아니어서 학교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고, 부에 소속되지 않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부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 가는 이들을 ‘귀가부’라고 따로 부르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느 한 부에 소속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다.
나도 중·고등학생 시절 축구부에 속해 연말연시나 여름방학 중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부활동을 하며 지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 있는 마지막 대회가 끝나면서 ‘은퇴’할 때까지 거의 매일 아침에 등교하면 먼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침 훈련을 하고, 오후 수업이 끝나면 바로 운동장으로 나가 역시 부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내 중·고등학교 시절 일상이었다. 나를 비롯한 축구부 학생들 누구도 프로 축구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프로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러한 부활동은 학창 시절의 일상이었다.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부활동에는 여러 종목이 있다. 축구, 야구, 육상 같은 메이저 스포츠는 대부분의 학교에 있고, 지도할 수 있는 교사만 있으면 유도나 검도, 가라테 같은 무도(武道)도 있다. 취주악부나 미술부, 연극부, 사진부, 화도부 등 문화계 부활동도 있다. 학생이 하고 싶은 활동이 있으면 학생 몇 명을 모아 고문이 되어줄 교사에게 부탁해 부를 만들 수도 있다.
문부과학성(교육부)이 정하는 학습지도요령에는 '학생의 자주적·자발적인 참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부활동에 대해서는 스포츠나 문화, 과학 등에 친숙하게 하고, 학습 의욕의 향상이나 책임감, 연대감의 함양 등 학교 교육이 목표로 하는 자질·능력의 육성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어 일반적으로도 부활동은 교육적인 의미가 있고, 학생들의 성장에 있어 중요한 활동으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동질성이 높은 부라는 집단 속에서 일어나는 집단 괴롭힘이나 왜곡된 가치관 형성과 같은 폐해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한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사들에게는 그러한 부활동의 고문을 맡으면 과도한 시간 외 노동이 강요된다는 큰 문제도 있기 때문에 일본의 ‘부활동’ 문화가 무조건 좋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직 미래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극소수의 예외를 두고 일률적으로 공부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한국의 교육 환경이 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한편 ‘잃어버린 30년’이라고 하는 일본 경제 정체를 경험해 온 일본의 ‘사토리(さとり) 세대’는 한국의 ‘N포 세대’와 자주 비교된다. ‘사토리 세대’는 사회의 모든 일에 대해 달관(사토리)하고 물욕도 출세욕도 없으며, 직장 생활이나 무엇보다 자신만의 생활이 중요해 연애나 결혼, 출산에도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토리 세대’를 낳은 일본의 경제 침체를 반면교사로 삼아 한국 사회가 꾸준한 경제 발전만 추구한다면 결국 혹독한 경쟁에 내몰리는 것은 젊은 세대일 것이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상당한 예산을 들여 저출산 대책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저출산 1위 국가라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구 감소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젊은 세대가 자신의 삶에서 포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거나 꿈을 가지기보다 ‘현실적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식으로 달관하지 않아도 될 사회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아이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필자 주요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블로그 칼럼〕 2024년 5월 현재, ‘저출산’과 ‘기후위기’ 앞에선 우리(나라)에게 ‘행복국가(구 복지국가) 체제로의 전환’은 출구이자 비상구인가?
https://blog.naver.com/ryu8689/223432705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