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정상회담 후 불과 보름 만에 다시 대결 국면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중국을 겨냥해 전기차 등 기술 분야에 대한 제재를 꺼내들었고, 중국은 광물 수출 통제 강화로 반격에 나섰다.
미국 재무부, 에너지부, 백악관 청정에너지혁신 및 이행실은 1일(이하 현지시간) 공동으로 작년 발표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보조금 수급 대상 관련 세부 규정을 내놓았다. 해당 규정은 전기차 및 전기차 배터리업체들이 '해외 우려 기관(FEOC)'으로부터 조달한 부품이나 핵심 광물을 사용했을 경우, 7500달러에 이르는 연방 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중국 기업들이 미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 배터리 소재를 공급하기 위해 다른 국가의 기업들과 합작 법인을 설립해 IRA 규정을 우회하던 것을 차단하겠다는 목적이다. 중국 언론들에 따르면 올해에만 총 17개 중국 배터리 기업들이 22곳의 해외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 규모는 140억 달러(약 18조원)를 넘어선다.
존 포데스타 백악관 청정에너지혁신 및 이행실장은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고용과 제조업의 중국 이전 추세를 되돌리겠다는 결심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며 "'미국에 투자하라(Investing in America)' 어젠다 및 오늘 재무부와 에너지부가 발표한 중요한 가이던스에 힘입어 우리는 전기차의 미래가 미국에서 만들어지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IRA는 배터리 부품 및 핵심 광물과 관련해 규정을 충족하는 전기차에 대해 총 7500달러의 세액 공제를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중 배터리 부품 규정을 충족하는 전기차는 전체 세액 공제의 절반인 3750달러를 제공하고, 핵심 광물 규정을 충족하는 전기차에 대해 나머지 3750달러를 제공한다.
이 중 배터리 부품의 경우, 북미에서 제조 혹은 조립해야 하는 비율이 올해 50%를 시작으로 매년 10%포인트씩 상승해(2024년과 2025년은 모두 60%) 2029년에는 모든 배터리 부품이 북미에서 제조 및 조립되어야 한다. 핵심 광물의 경우는 미국 및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추출, 가공되거나 북미에서 재활용하는 비율이 올해 40%를 시작으로 매년 10%포인트씩 올라 2027년에는 80%까지 높아져야 한다.
여기에 이번에 발표된 FEOC 관련 규정으로 말미암아 배터리 부품은 2024년, 핵심 광물은 2025년부터 FEOC가 관여한 경우에는 세액 공제 혜택이 불가능해진다.
세계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기차 주요 부품인 리튬-이온 배터리의 경우, 중국이 전 세계 생산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배터리 주요 소재인 양극재와 음극재 역시 전 세계 생산량의 각각 85%, 70%를 차지하고 있어 배터리 소재 시장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다.
IRA 법안의 대표 발의자인 조 맨친 미 상원의원(민주당, 웨스트버지니아)은 "FEOC에 대해 가능한 엄격한 기준을 유지하는 것은 미국 에너지 안보를 담보하고 국내업계 발전을 장려하며 궁극적으로는 미국 납세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길"이라며 "나는 최근 중국 배터리 기업들이 IRA 혜택을 받기 위해 한국과 모로코 등에서 합작회사 및 투자 등을 포함해 사업 기회와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매우 우려스럽다"고 전했다.
반도체
미국의 대중국 기술 제재는 전기차뿐 아니라 반도체 영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2일 캘리포니아 시미 밸리에서 열린 연례 국방 포럼에 참석해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핵심 기술이 중국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라며 "우리가 겪은 사상 최대의 위협"이라고 못 박았다. 앞서 상무부는 지난 10월에 제재 범위를 기존의 첨단 반도체에서 저사양 반도체까지 확대한 새로운 대중국 AI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를 내놓았다.
그는 포럼에서 "여기 있는 반도체 기업 최고경영자(CEO)들 중 제가 (수출 통제 조치를) 한 것과 관련해 매출 감소로 인해 다소 불쾌한 분들도 있는 걸로 알고 있다"면서도 "우리의 국가 안보를 보호하는 것이 단기적 매출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아가 "미국은 AI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며 "그들(중국)이 따라잡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촉구했다.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 화웨이가 자체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칩을 사용해 최신 스마트폰 메이트 프로60을 출시한 이후 미국의 경각심이 한층 커진 모습이다.
중국 반격
미국의 공세에 중국도 반격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 중국은 특히 전 세계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는 희토류 등 광물을 앞세워 미국에 대항하려는 태세이다.중국은 지난 8월 마그네슘, 갈륨 수출 통제를 개시한 데 이어 이달 1일부터는 흑연 수출 통제에 나섰다. 이에 해당 소재를 수출하려는 기업들의 경우,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해당 소재들은 전기차, 반도체 등 미국이 대중국 수출 통제를 취하고 있는 첨단 제품들에 사용되는 주요 광물들로, 중국이 전 세계 생산량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핵심 광물 공급 통로를 차단하겠다는 포석이다.
중국 해관총서(관세청)에 따르면 지난 3년간 흑연 수출액은 2배로 늘어난 가운데 작년 수출액은 총 84억 달러에 달했다. 전기차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배터리에 들어가는 전 세계적인 흑연 수요도 늘어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1일 리창 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원 상무회의에서 '광산자원법(수정초안)'을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실행될 계획으로, 이 경우 2009년 이후 14년 만에 개정되는 것이다.
국무원은 "광산 자원은 경제 사회 발전의 중요한 물질적 기반이다"라며 "형세 변화에 따라 적시에 광산자원법을 수정하는 것은 광산 자원을 법에 의거해 개발 및 보호하고, 국가 전략자원 안전을 보장함에 있어 십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해당 법안은 광산 자원의 탐사·개발 등과 관련한 관리 제도를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는 가운데 광물에 대한 중국 정부의 통제력이 확대돼 세계 시장에서 중국 정부의 광물 수출 통제가 미치는 영향력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이미 작년부터 해외 기업들의 광산 프로젝트 참가를 금지했다.
따라서 미·중 양국은 지난달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기간 중 정상회담을 갖고 관계 개선 제스처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핵심적 사안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루지 못한 가운데 다시 대결 국면으로 돌아서게 됐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핵심 광물을 둘러싼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됐다"며 "우리의 첨단 산업 미래를 짓기 위한 블럭들에 대한 경쟁이 보호주의와 갈등을 촉발하고 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