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후반 얘기다. PC통신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남녀를 그린 영화 '접속'의 인기 이후 PC가 빠른 속도로 보급됐다. 혜성처럼 나타난 배우 전지현이 '삼성 마이젯 프린터' 광고에서 보여준 자태에 반해 집집마다 프린터도 한대씩 구매하던 때다.
타자기가 자취를 감추고 아래한글을 쓰는 것이 일상이 됐다. 여전히 공공기관은 해당 문서 양식을 아래한글로 만들어 출력해 놓고 그 위에 타자기로 글자를 하나하나 새기고 있었다.
당시 부장들은 기사를 쓰고 나면 프린트한 뒤 빨간 플러스펜으로 교열 부호를 잔뜩 적어 넣었다. 데스킹이 끝난 기사를 기사입력기에 입력하고 나면 한번씩 헤프닝이 벌어진다. "이거 내가 고친 기사 맞아?"라는 부장의 질문, 플러스펜이 지나간 자리를 확인해 보고 조용해지는 편집국이 일상이었다.
PC를 거부했던 수많은 선배들의 이유는 "옛 것이 좋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는데' 하는 귀찮음도 거들었을 것이다.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스스로 디지털을 거부하고 아날로그로 남아있던 이들은 이제 없다. 시골에 계신 어르신들도 온라인 쇼핑을 배우고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얘기하는 시대다.
최근 정부가 공매도 전산화에 나섰다. 수십, 수백억원대의 불법 공매도 사례가 적발되면서 전산화 요구가 거세졌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수기로 한다는 것만 해도 충격적인데, 전산화 하기가 힘들어 여태 못했다는 얘기는 더 놀랍다.
몇년 전 정부는 공매도 전산화를 놓고 검토했지만 결국 힘들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세계 어느 나라도 실시간으로 공매도 현황을 파악하는 시스템은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증권사들의 의견도 같다. 금융시스템의 경우 정교하게 작동해야 하고 오류도 없어야 한다. 오류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면 아날로그가 맞다는 얘기다.
비슷한 질문을 IT 전문가들에게 해봤다. 어렵다기 보다 투자의 문제에 가깝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넷플릭스는 2억명이 넘는 사용자들의 시청 행태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이를 토대로 추천 콘텐츠를 제공한다.
공매도 전산화 시스템보다 어렵겠냐는 반문이 이어졌다. 증권가 얘기대로 워낙 복잡한 시스템이라 실시간 전산 시스템 구축이 어렵다면 해외처럼 수기로 기록하던 것만 전산화 하면 된다고 얘기했다.
금융 시스템이다 보니 만에 하나 오류가 발생해선 안된다는 얘기는 현실을 도외시한 핑계에 가깝다. 오히려 수기로 공매도를 기록하다보니 크고 작은 오류가 매일같이 벌어진다.
최근 수십, 수백억원대의 불법 공매도로 막대한 이익을 얻은 해외 투자은행(IB)들이 적발됐다. 상당 사례가 '실수'다. 수기로 기록한 뒤 이를 전산에 입력하는 과정에서 잘못 입력했다는 해명이다. 실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당연히 전산화를 해 잠재적 범죄 사례를 줄이는 것이 맞다.
공매도 주문을 전화, 팩스로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전산화가 어렵다는 설명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증권사는 객장 수를 줄이고 있다. 아예 거래를 위한 객장이 없는 곳도 있다. 전체 거래의 80%가 PC를 이용한 HTS(홈트레이딩시스템)와 MTS(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으로 이뤄진다.
최근에는 HTS 비중도 줄고 있다. 비용만 나가는 객장을 유지할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기 좋을 때만 외치는 디지털은 현재를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
필요한 것은 공정의 담보다. 힘센 플레이어에 더 유리한 운동장이 돼선 안된다. 공매도 금지 조치 이후 외국인 투자자가 이탈할 것이라는 예측은 이미 빗나갔다. 외국인은 계속 사고 개인 투자자들만 팔았다.
공매도를 금지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가속화 될 것이라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금까지 외국인 투자자에 크게 유리한 공매도 제도가 유지됐지만 우리는 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우려해왔다.
투자자 보호를 위해 개인투자자들에게 공매도를 허용하기 어렵다는 생각 역시 교조적이다. 모든 투자 상품 약관에 써 있듯 투자는 스스로의 판단이며 손실 역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차라리 손실을 볼 수 있으니 투자 말고 저축만 하라는 얘기가 더 합리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