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3국 정상이 8월 18일(현지 시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정상 회의에서 3국의 지속력 있는 협력을 위한 지침과 비전, 이행 방안을 문서화한 이른바 ‘캠프 데이비드 원칙’과 ‘캠프 데이비드 정신’, 그리고 ‘3자 협의 공약’ 등 문서 3건을 발표했다.
3국간의 협력을 천명한 “원칙”에서는 ‘공동의 가치·규범’에 기반해 인도·태평양 지역과 전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고, 경제규범, 첨단기술, 기후변화 등의 글로벌 이슈에도 ‘공동 대응’한다는 입장의 원칙을 천명했다. 3국은 이러한 원칙이 “우리가 함께할 새로운 장의 시작”이라면서 “3국이 하나가 될 때 더 강하다”고 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패권 팽창에 한·미·일이 공동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관련해서는 북한 미사일 경보 정보 실시간 공유 체계를 연내에 가동하고 한·미·일 방어 훈련을 연례화하는 등 공동 대응 능력을 실질적으로 강화하기로 했다. 북한이 암호 화폐 탈취와 금융 분야 해킹 등을 통해 핵·미사일 개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북한의 불법 사이버 활동 감시도 강화하기로 했다. 3국 정상은 북한에 억류 중인 국군 포로 문제 해결과 자유롭고 평화로운 한반도 통일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도 뜻을 같이하고, 이를 정상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이 같은 사안이 3국 정상회의에서 공식 논의된 것은 처음이다. 이번 정상회의 의제가 결정되는 데는 자유,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중시해온 윤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분야에서는 한·미·일이 반도체 등 공급망 안정을 위해 정보를 신속히 공유하는 ‘3국 조기 경보 시스템’을 신설하기로 했다. 3국은 또 미국의 ‘혁신 기술 타격대’를 벤치마킹해 첨단 기술 탈취를 막기 위한 공조 체제를 구축하기로 했다. 한·미·일은 이를 위한 정례 협의를 개최해 공조 방안을 마련하고 ‘핵심광물안보파트너십’, ‘공급망강화파트너십’ 등 3국이 참여하는 다자 협의체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해나가기로 했다.
3자협의에 대한 “공약”에서는 역내의 위험 도발이 3국의 이익과 직결될 때 ‘정보교환, 메시지 조율, 공동대응방안’을 협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역내(域內) 안보 위협 발생 시 3국이 협의를 통해 공동 대응을 모색한다는 내용이다. 3국 안보 협력 범위를 한반도를 넘어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넓히고 그간 북한 핵·미사일 위협을 중심으로 한미, 미일 군사 동맹 체제로 작동해온 3국 안보 협력이 포괄적 지역 다자 안보 협력체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한국은 캠프 데이비드 합의로 명실상부하게 미국과 일본의 대등한 파트너로 동아시아는 물론 신(新) 세계 질서 구축의 동반자가 됐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1965년 한일 수교에 이어 3국 간 파트너십을 구축해 경제·안보적으로 더 강력한 방파제를 확보한 의미는 작지 않다. 정부 수립 후 75년 만에 새로운 차원의 국제 협력 체제를 갖춘 것이다.
구한말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한국 패싱이 미국의 전략이었다. 일본제국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던 때 약관 29세의 이승만이 대한제국의 밀사로 미국을 방문해 미국 국무장관 등을 만나 대한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미 1905년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간에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었다. 후일 1910년 한일합방 때 태프트는 미국의 27대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2차대전의 종전이 가까워 오자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한반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련에 맡겨둔다’는 비밀흥정이 있었다. 결국 해방과 동시 북에는 소련군, 남에는 미군이 진주해 한반도가 분단되는 비극이 시작되었다.
1950년 1월에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1949년 건국된 중공에 대한 미국의 태평양 방위전략에서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정한다는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 ‘애치슨라인’을 발표해 한국과 대만이 방위선에서 제외되었고, 한국전쟁 발발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구한말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미국은 왜 한국 패싱 전략을 고수했을까. 한마디로 당시 한국은 미국이 지켜줄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폐쇄적 빈국으로 분석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가운데 당시 한반도의 전쟁이 확전될 경우에는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했던 미국은 1953년 정전협상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 통일 없는 휴전협정에 반대해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거제도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하는 한편 미국과 끈질긴 협상을 하는 등 강온 양수를 두는 전략을 구사하여 마침내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8월 8일 경무대에서 가조약, 1954년 10월 1일 미국 국무부에서 공식체결)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이 한미동맹이 북한의 끊임없는 침략야욕 속에서도 후일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에 힘입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도약발판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 시 처음으로 삼성반도체를 방문했듯이 구한말과는 달리 이제 한국은 미국의 대중국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로 성장했고 그 결과 한미방위조약 69년 만에 동북아안보경제동맹의 신기원을 연 한미일 캠프데이비드 협약을 도출한 것이다. 지금 동북아정세는 2차대전 후의 냉전을 방불케하는 신냉전의 최전선으로 격화되고 있다. 북중러의 도발이 언제 있을지 모를 정도다. 한일관계 등 많은 논란이 있겠지만 미래만을 생각하고 한미일이 합심해서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시대정신이고 임무다. 이를 위해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되고 있는 첨단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한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된다.
이번 3국 정상회의를 통해 위기감을 느낀 북한이 더욱 도발적인 자세로 나올 수도 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3국의 공통 이익을 최대화하면서도 북한·중국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대화와 협력의 노력도 필요하다. 윤 대통령의 8·15 광복절 경축사 지적처럼 아직도 준동하고 있는 공산전체주의 반국가세력에 대한 대응전략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만이 번영을 가져온다는 점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 주요이력
▷고려대 경제학과 ▷맨체스터대 경제학 박사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금융ICT융합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