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화 막은 농지개혁
1950년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이래 최대 규모로 사회경제적 토지 구조를 바꾼 혁명이었다.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그 농토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은 9차례에 걸친 헌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제121조 ①항에 오롯이 담겨 있다.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 경자유전은 농촌인구 감소와 노령화, 농업 기계화와 대리 경작 등으로 근년에는 그 의미가 다소 퇴색한 감이 있지만 조선왕조 이래 일제강점기를 거쳐 건국에 이르기까지 수탈적 소작제도의 폐지를 염원하는 농민의 한이 서린 화두였다.
조선은행 조사부가 1945년 말 기준으로 조사한 《조선경제연보》(1948)에 따르면 전체 농민 중 48.9%가 소작농이었고, 소자작농 34,6%, 자작농 13.8%였다. 광복 당시 1정보(3000평) 미만인 영세 자작농까지 합하면 영세 농가가 90%나 됐다. 대부분 농지가 극소수 지주들의 소유였고 전체 인구 중 70%인 농민은 대다수가 사실상 소작농이었다.
1979년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북한의 토지개혁이 남한의 농지개혁에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북한의 토지개혁이 남한에서 농지개혁법 개정 논의를 시작해 제정·공포에 이르는 장기간의 과정에서 상시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북한을 뒤따라가는 개혁을 하면서도 ‘세계 농지개혁사에서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농민의 이익이 배제되고, 오직 봉건적 지주의 기존 권리를 보상하는 데 주안을 두고 있는 농지개혁법을 만들었다’고 <해전사>는 깎아내렸다.
국토통일원 통일교육원장과 3선 의원을 지낸 이영일 전 의원이 저술한 《건국사 재인식》(건국사)은 대한민국 건국, 반민특위와 함께 농지개혁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건국사>는 ‘한국이 농지개혁을 통해 세계 최고의 균등성을 지닌 자작농의 나라로 변신하고, 이것이 밑바탕이 되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오늘날 G20 반열에 오르는 역사를 일구어냈다’고 찬사를 보냈다. 남한 농지개혁의 성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해전사와 관점과 크게 대비된다.
헌법기초위원회 의뢰로 헌법 초안을 작성한 유진오 고려대 교수는 후일 회고록에서 한민당 영수인 인촌 김성수를 방문해 헌법 초안을 전달하고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이때 인촌은 내각제를 비롯해 양원제, 농지개혁, 중요 기업의 국유화에 대해 대체로 찬성하면서도 농지개혁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해전사>와 <건국사>의 상반된 평가
인촌 김성수는 3247정보의 농지를 가진 조선 최대 지주였고,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농지개혁 문제를 안이하게 보아 넘기기 힘든 처지였다. 그러나 유진오가 농지개혁을 통해 농민에게 토지를 적정히 분배해 자기 소유 토지에서 농사를 짓도록 해주는 길만이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하자 인촌이 동의했다고 회고했다. 이영일은 “만약 인촌의 동의를 못 얻어 제헌헌법 제86조가 제정되지 않고 농지개혁법이 발의되었다면 국회에서 통과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뒤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니 우리나라의 농지개혁은 오늘날 필리핀이나 브라질처럼 손도 못 댈 뻔했다”고 기술했다.
당초 공산당은 한민당이 정국을 주도하는 한 지주들의 계급적 속성 때문에 농지개혁은 불가능할 것이고 설사 5·10선거에서 우익정권이 수립된다 해도 농지개혁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한민당은 인촌을 필두로 농지개혁을 수용했다고 <건국사>는 평가했다.
이승만은 지주 출신이 많은 한민당이 농지개혁에 장애가 되는 것을 경계했다. 이영일은 ‘이승만이 공산당 출신인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농지개혁에 의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면서 지주세력이 중심인 한민당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고 분석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간한 《한국농지개혁사》(1986)에 따르면 조봉암은 장관 부임과 동시에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를 구성하고 법안 제정에 착수했다. 농림부에는 조봉암 장관 발탁으로 동경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강정택 차관을 비롯해 실무 과장 중에도 좌익계 이론가가 많았다.
농림부안은 지주 토지의 ‘매수’를 ‘징수’라고 규정하고 토지 소유 상한선을 2정보로 한 것 등이 국무회의에서 문제가 되었다. 국무회의 결정으로 이순택 국가기획처장이 재검토를 해 ‘징수’라는 용어를 없애고 토지 소유 상한선을 2정보에서 3정보로 늘렸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농지개혁법 최종안은 소유 상한 3정보(45마지기), 보상지가 150%, 연간 보상 30%, 상환 연한 5년 균분으로 확정됐다. 한민당이 소유 상한선만 관철했을 뿐 나머지 핵심 조항은 농립부안과 정부안을 절충한 농지개혁법이 1950년 3월 10일부로 공포됐다. 뒤이어 일사천리로 농지개혁법 시행령은 3월 25일, 시행규칙은 4월 28일, 농지분배점수제 규정은 6월 23일 공포되었다. 그리고 이틀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아슬아슬한 시간차였다.
4년 먼저 하면서 집단농장 만든 북한의 토지개혁
이승만 대통령은 ‘춘경기(春耕期)가 촉박하므로 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농지개혁법 시행령 시행규칙 등이 미처 공포되기도 전에 농지개혁이 강행되었다. 관련 법령의 완벽한 입법을 기다렸다면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북한 공산당 주도로 실시될 뻔했다. 1950년 7월 4일 공포된 북한 공산당의 남반부 토재개혁령은 제2조 5항에서 ‘이승만 괴뢰 정부 및 그의 기관과 지주로부터 연부(年賦)로 매입해 자작하는 토지는 몰수하지 않는다’고 해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을 추인했다.<건국사>
남시욱은 《한국보수세력 연구》를 통해 남한의 농지개혁이 공산화를 막는 데 주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박현영은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빨치산과 노동자·농민들이 즉시 봉기해 남한 전역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1950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다짐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에도 남한 인민들은 봉기하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지개혁으로 자기 땅이 생겼기 때문이다. 토지개혁은 북한이 사회주의 방식으로 선수를 쳤고 남한의 정세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결국은 남한의 여러 정파와 이해세력이 조정을 통해 농지개혁을 담은 헌법과 법률을 만듦으로써 공산화를 막는 튼튼한 제방이 되었음은 역사를 읽는 묘미다.
농지개혁 실행 과정에서 지주들의 권익은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다. 농지개혁이 한국전쟁을 앞두고 급속하게 마무리되는 바람에 지가증권을 받고 정부에 토지를 매각한 지주들은 전쟁과 극심한 인플레이션 속에서 지가증권의 가치가 폭락하자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 썼다. 1954년까지 완료돼야 할 지가 보상도 전쟁과 자연재해로 농민들의 부담 능력이 떨어져 1968년에야 완료됐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의 간판으로 조봉암을 써먹고 나서 그가 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하고 216만표를 얻자 정치적 위협을 느끼고 사법의 심판대에 올려 처형했다. 정치의 비정함이고 교활함이다. 조봉암은 2011년 재심에서 대법원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지 52년 만에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농지개혁으로 교육인구 늘어 산업인력 제공
동남아와 중남미에서는 지주들의 극심한 반발로 실패했던 농지개혁이 한국에서는 성공했다. 한국은 성공적인 농지개혁으로 산업화에 필요한 인력을 적절하게 공급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농지개혁으로 양곡을 자유롭게 팔 수 있게 된 농민들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자녀를 집에 붙잡아두고 농사일을 시키는 대신 학교에 보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간한 《2012 경제발전경험 모듈화사업 : 한국의 농지개혁》(2013)에 따르면 1945년 136만명이었던 초등학생 수는 1955년 287만명으로 두 배 늘었다.
농지개혁법은 제정 과정에서 개혁 대상지에 대해 예외를 설정해 사학재단의 육성을 유도했다. 교육기관 농지에는 농지개혁을 적용하지 않자 지주들이 사학재단을 만들었다. 1943년 39개였던 사립중학교가 1953년 246개로 늘었다. 사립대학교는 10개에서 49개로 늘었다. 결국 농지개혁으로 설립된 많은 사학 덕분에 초등교육뿐 아니라 중등 및 고등교육을 받은 농민의 자녀들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1946년 남한보다 토지개혁을 4년이나 먼저 완료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남한의 토지개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한민당과 지주들도 “공산화를 막으려면 농지개혁을 막을 수 없다”고 물러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시행령도 채 만들어지지 않은 법률을 밀어붙였다.
북한의 농민들은 토지개혁을 거쳐 인민공화국의 소작농, 더 심하게 말하면 북조선을 장악한 김일성 유일지주(唯一地主) 집안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해전사> 출간 43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한 농지개혁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자리를 못 잡고 있다. <해전사>의 논리와 분석을 뛰어넘는 <건국사> 같은 연구가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