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공화당에서 여론조사 2위를 달리는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한참 앞서가는 트럼프에 역전승을 할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디샌티스보다 30%포인트 이상 높게 나온다.
디샌티스 주지사 외에도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 팀 스코트 상원의원(사우스 캐롤라이나) 등 경선에 나섰거나 뛸 준비를 하는 후보가 12명에 이른다. 새로 진입하는 후보들이 많을수록 고정표가 많아 유리하다는 것이 트럼프 진영의 판단이다. 신참들이 2위인 디샌티스의 표를 가져갔으면 가져갔지, 결속력이 강한 트럼프의 표를 잠식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지지기반은 전체의 30%가 넘는 충성도 높은 공화당원들이다. 다른 공화당 후보들도 트럼프를 때리는 데는 부담을 느끼지만 디샌티스에게는 편하게 펀치를 날린다. 온갖 추문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를 여전히 좋아하는 공화당원들은 그를 공격하는 후보들을 의심한다. 이대로 가면 공화당은 트럼프 후보로 굳히는 분위기다.
트럼프에게 밀려온 사법 리스크
거칠 것 없던 트럼프에게 최근 사법 리스크가 파도처럼 밀어닥치고 있다. 그가 과연 대통령 선거전을 중단 없이 치를 수 있을까. 그러나 미국 헌법과 법률 어디에도 그가 현재 받고 있는 혐의로는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못하게 할 방법이 없다. 이론적으로는 설사 그가 교도소에 수감되더라도 선거운동을 계속하다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도 있다. 다만 그가 법률적인 다툼을 계속 본선까지 끌다 보면 시간과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전현직 대통령 중에서 처음으로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2016년 대통렁 선거 때 자신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포르노 영화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에게 마이클 코언 변호사를 통해 13만 달러를 주고 입막음을 하려 한 혐의다. 트럼프의 최측근이던 코언은 자신에 대한 수사와 재판에서 트럼프의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저격수로 돌아섰다. 트럼프는 이 사건으로 기소된 뒤 검찰에서 지문 채취를 하고 여느 형사피고인들처럼 머그샷(범인 식별용 얼굴사진)을 찍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치욕스런 일이지만 충성도 높은 공화당원들에겐 이런 트럼프가 순교자로 비친다.
그는 전직 잡지 칼럼니스트인 E 진 캐럴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성적 학대와 명예훼손 사건과 관련해 50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캐럴은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트럼프가 여성용 선물을 고르는 것을 도와달라고 제안해 속옷 코너에 함께 갔다가 탈의실에서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단은 성폭행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성적 학대에 대해 200만 달러, 명예훼손에 대해 30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트럼프는 캐럴이 회고록을 많이 팔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몰아붙였다. 트럼프는 공화당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진짜 피해자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뉴욕 맨해튼 배심원들의 전원일치 평결은 트럼프에게서 여성표를 떨어져 나가게 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 하원 특별조사위원회는 1년 6개월 동안의 활동을 마치고 2021년 1월 6일 의사당에서 조 바이든 후보의 선거 승리를 확인하는 절차를 방해하려는 군중 폭동을 선동하는 등 4가지 혐의로 트럼프를 수사·기소하라고 법무부에 의뢰했다. 법무부는 폭동 관련자 수백 명에 대한 수사를 마쳤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아직 진행하지 않고 있다. 법무부 조사관들이 층분한 증거가 있다고 판단하면 수사가 끝나는 대로 기소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화당의 선두주자에 대한 법무부의 수사 및 형사소추라는 정치적 후과를 감안하면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트럼프는 공화당 강세주인 조지아주에서 바이든에게 근소한 표차로 패배하자 조지아주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대선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표를 찾아내라’고 압박한 혐의로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 지검의 수사를 받고 있다.
법무부는 트럼프가 퇴임 후 국가기밀문서를 플로리다 저택인 마라라고 리조트에 옮겨 놓은 것에 대해 미국의 국가안보를 해친 간첩죄 위반 혐의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 압수수색을 통해 찾아낸 문건 중에서 100건가량이 국가기밀로 분류된 문서였다. 트럼프는 법무부의 수사를 정치적 의도를 가진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한다.
“미국 대선, 진영표 결속만으론 승리 못해”
공화당 내부에도 트럼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공화당의 미트 롬니 상원의원(유타)은 CNN 의회 담당 특파원과 인터뷰에서 캐럴 사건과 관련해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되기에 부적합할 뿐 아니라 우리 어린이들이나 세계인들에게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내세우기에도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논평했다.
영국 BBC 방송이 인용한 두 공화당 상원의원도 2024년 트럼프의 백악관 재진입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공화당 존 튠 상원의원(사우스 다코다)은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는 누적 효과(Cumulative Effect)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누적 효과는 어떤 상황이 쌓여서 장기적으로 발생하는 효과를 말한다. 공화당 존 코닌 상원의원(텍사스)은 “나는 그가 당선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기 진영만을 끌고 승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중도진보 성향의 세계적인 유력지 이코노미스트는 노골적인 반(反)트럼프다. 이코노미스트는 사설에서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서구를 분열시키고 블라디미르 푸틴을 기쁘게 할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자기가 선거에 이겨야만 선거결과를 받아들이는 사람, 2021년 의회를 침입한 폭도들을 순교자라고 부르고, 형법 위반과 관련한 여러 사건에서 동시에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 성적 학대로 민사소송 전과 기록을 덧붙인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돼야 하겠느냐는 의문을 던진다. 미국과 민주주의, 보수주의, 품위 등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가 아닌 디샌티스나 다른 공화당 후보자가 불가능에 도전해 이기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신뢰 못할 지도자’ 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재진입은 한국으로 봐서도 악몽의 재현이다. 트럼프는 북핵위기를 해결하겠다며 김정은을 판문점과 하노이에 불러내 사진 찍기용 쇼를 하다가 득표전략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하자 차버렸다. 이런 회담에 문재인 대통령이 끼어들기를 시도하다 실패한 것은 더욱 딱하다.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앞으로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는 남조선 문재인 대통령이 함께하는 게 아닌, 각하와 제가 직접 논의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문제들에 문 대통령이 보이는 과도한 관심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트럼프는 주한미군 완전 철수를 거론하며 방위비 분담금을 5배로 올리라고 요구했다고 마크 에스퍼 미국 전 국방장관이 회고록에서 밝혔다. 트럼프는 동맹국과의 관계에서도 보호비를 갈취하는 마피아 보스를 연상시킬 때가 있었다.
2016년 대선과 달리 2024년 대선에서 미국인들은 7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트럼프를 더 잘 알게 됐다. 트럼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트럼프 자신이다. 트럼프의 발언 내용을 팩트체크하고 그의 위험성을 알리는 미국 유력 언론의 자세는 2016년과는 다르다.
바이든에게도 고령 등 약점이 많지만 민주당 후보가 되는 데는 무리가 없는 것 같다. 당내에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후보가 가문의 배경에 힘입어 20% 안팎의 지지를 받고 있으나 과학에 어긋나는 반(反)백신주의와 각종 음모론 주장으로 지지율 상승에 한계가 있다.
결국 바이든 대(對) 트럼프로 갈 공산이 유력한 내년 대선 구도에서 확증편향(確證偏向)의 정치이념에 찌들지 않은 미국인들의 선택이 미국을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