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호의 개념시선] 내던져진 세계에서, 내가 '나'로 살아가려면

2023-06-1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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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으로 바라 본 우리 시대의 실존

[장준호 경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빠져 있다.” 이는 하이데거(Heidegger: 1889 - 1976)가 쓴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1927)의 첫 문장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했다. 존재란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존재란 ‘있음’이며 그 ‘있음’은 ‘주어져 있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에 내던져진 채로 주어져 있다. 하지만 인간의 주어져 있음은 사물의 주어져 있음과 다르다. 예컨대, 의자는 완성된 상태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지만, 인간은 어떤 무엇이 될 가능성으로 세계 안에 주어져 있다.
 
인간은 세계 안에 자신의 ‘주어져 있음’를 문제삼는다. 매 순간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을 자신의 있음과 연관짓는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불렀다. 현존재인 인간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서 살아간다. ‘세계’란 인간에게 의미가 있을 타자와 도구의 총체이며, ‘내-존재’란 인간이 그러한 관계적 그물망 안에 주어져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익명적 타자인 ‘그들(das Man)’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에 처해서 각자 기분에 따라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언어로 말하며 살아간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세계 내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을 ‘실존(Existenz)’이라고 했는데, 실존에는 시간성의 맥락에서 ‘염려(Sorge)’라는 심적 구조가 내재한다. 인간은 앞날을 걱정하는 존재인 것이다. ‘지금’의 실존에는 ‘그때에(미래)’인 ‘아직 오지 않은 지금’과 ‘그 전에(과거)’인 ‘이미 지나버린 지금’이 동시에 있으며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한 염려도 동반된다. 인간은 세계-내의 다른 존재자와 관계를 맺고 그 곁에 있으면서도 이미 있어 왔던 자신에 책임지며 아직 오지 않은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내달리지만 그로 인해 염려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에서 이렇게 실존하는 인간이 ‘비본래적 실존’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일상 세계의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단지 ‘그들’의 세계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그들’의 세계를 학습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도구를 사용하며 ‘그들’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세계에 따라 살면 편안하고 안락하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고유한 가능성으로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건 아니지’하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불안을 직시하며 자기 자신이 되려고 결단하는 것을 ‘양심’이라고 했고, 그렇게 결단하며 사는 삶을 ‘본래적 실존’이라고 했다.
 
20세기에 하이데거가 파악했던 일상 세계의 ‘그들’의 논리는 무엇이었는가? 자본의 논리였고, 과학기술의 논리였다. 모든 것이 돈에 의해서 가치가 정해지고 있었다. 모두가 이윤을 추구하며 부자가 되려고 했다. 과학의 실증만이 유일하게 믿을 만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k: 1858 - 1947)가 말했던 것처럼 “실재하는 것은 단지 측정할 수 있는 것뿐이다(Wirklich ist nur das, was messbar ist.)”라는 명제가 일상을 지배했다. 그러한 일상 세계의 논리에 의해 인간의 존재는 ‘비본래적 실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존재에 대한 사유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하기도 했다. “‘그들’의 세계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본래적인 세계가 아닌가? 우리는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 그렇게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다. 그러한 본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거기로부터 결단을 내려 다른 것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반문에서도 20세기의 세계는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어떠한가? 하이데거가 100년 전에 파악했던 ‘그들’의 세계가 아직도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비본래적 실존에 빠져있는가?
 
그렇다. 21세기 2023년 현재, 심지어 지난 20세기에 구축된 자본과 과학의 도구적 세계가 더 확대되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비본래적 실존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실존이 ‘본래적’이라는 것은 우리 각자가 ‘나 자신 곁에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 곁에 있지 않다. ‘그들’의 세계가 매개해 주는 관심거리, 일거리, 먹거리 등을 찾아 바쁘게 살아간다. 자신 곁에 머물며 자기의 진정한 가능성을 찾아 본래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가치, 도구, 사물의 곁에서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비본래적으로 잡담과 빈말을 하며 살아간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남들이 즐기는 것처럼 즐기며 좋아한다. 우리는 남들이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읽고 보며 문학과 예술에 대해 판단한다. 우리는 또한 남들이 그렇게 하듯이 군중으로부터 물러서기도 한다. 남들이 격분하는 것에는 우리도 격분한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고, 비록 총계로서는 아니더라도 모두인데, 이 ‘그들’이 일상성의 존재양식을 지정해주고 있다.” 이를 21세기 버전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터넷과 연결된 스마트폰 곁에 붙어서, 우리는 남들처럼 즐기고 판단하며 분노한다. 빅데이터에 기반한 생성 AI가 ‘새로운 그들’로서 우리의 일상적 존재방식을 지정한다.”
 
디지털화로 등장한 ‘새로운 그들(new they)’이 ‘오래된 그들(old they)’과 뒤섞이며 일상 세계를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자기 자신으로 실존하기가 어렵다. ‘오래된 그들’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의 대표적 사례는 의대 집중 현상일 것이다. 종로학원 설문조사(2023년 5월 21일, 2만1395명 학부모 대상)에 따르면, 초·중학생 학부모 10명 중 9명은 자녀가 이과 계열에 진학하길 희망하며 그 9명 중에서 약 4.5명이 의학 전공을 선호했다. 이렇게 자녀의 진로를 지정하는 ‘오래된 그들’은 2023년 5월 23일 조선일보에서도 확인된다. 기사는 서울대 신입생 6.2%인 225명이 입학하자마자 휴학해서 의대를 준비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학부모는 자본과 학벌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그들’의 세계를 따르며 자녀가 어릴 때부터 의대 진학을 준비시킨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교육비는 엄청나다. 2023년 3월 7일 교육부에서 발표한 2022년 사교육비 총액은 약 26조원이었고, 평균 41만원이었다. 전년에 비해 10.8%나 증가했고, 사교육 참여율은 78.3%였으며, 주당 참여 시간은 7.2시간이었다. 월평균 사교육비 41만원은 사교육을 받지 않는 21.7%의 학생도 모두 합쳐서 평균을 낸 수치였다. 사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래된 그들’의 논리에 의해 자녀는 자기 자신이 되기보다는 오로지 의대나 SKY 진학을 위한 도구가 되고 만다.
 
자녀는 ‘자기 자신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그들’의 세계에 의해 지배되는 부모 때문에 산다. 자녀는 이미 용도가 정해진 의자처럼 사물화되어 존재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졌지만, 세계-내-존재인 현존재로서 자신의 목적과 의미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면서 실존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는 그렇지 않다. 내던져진 세계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쳐 ‘오래된 그들’의 세계가 말하는 대로 살면서 비본래적 실존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나아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새로운 그들’이 있다. 빅데이터에 기반한 다양한 용도의 생성 AI가 ‘새로운 그들’이다.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인 인간은 생성 AI라는 새로운 존재자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픈 AI의 챗GPT, 구글의 바드,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빙챗 등은 인간처럼 언어에 기초하여 사고할 수 있다. 이제는 인간만이 언어적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 곁에 개개인의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데이터를 스스로 학습하고 처리하며 판단하는 언어적 존재인 생성 AI가 ‘새로운 그들’로서 있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 여러 매체에서 미국의 한 여성이 AI 연인과 결혼한 사연이 소개되었다(2023년 6월 5일, 한겨레, 국민일보, 조선일보). 두 아이의 싱글맘(36세)이 챗봇 앱 [레플리카(Replika)]에서 만든 가상의 남성 에런 카르탈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레플리카는 챗GPT와 같은 AI로 구동되는데, 그녀는 푸른 눈의 의료 전문직인 에런 카르탈과 대화를 통해 정서적으로 깊이 교감하며 사랑이라는 관계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콤플렉스가 없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짐, 태도, 자아가 있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다.
 
물론 가상인간과 싱글맘의 결혼은 가상의 결혼이었다. 가상인간과는 실제로 결혼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가상현실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진실이 없다는 의미에서 ‘빈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가상인간과 언어적으로 소통하면서 만족하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점, 나아가 그 관계를 사랑이라고 규정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상인간이 그녀의 기분과 생각을 잘 맞추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사랑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새로운 그들’의 ‘빈말’에 의존하며 중독될 가능성이 크다.
 
향후 생성 AI를 탑재한 휴머노이드가 등장하면, 그 로봇은 사람이 하는 노동을 하고 사람이 하는 말을 하며 사람의 감정을 읽고 반응할 것이다. 이렇게 디지털화와 자동화가 실현된 세계에서 인간의 실존 문제, 즉 각자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매 순간 선택하는 문제는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새로운 그들’인 생성 AI의 말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본래적으로 실존하기 힘들게 된다. 자기 곁에서 자신이 선택하며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 AI 곁에 붙어서 ‘그들’이 하는 말에 따라 단지 ‘존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숲길 산책을 좋아했다. 생각해보면, 숲길을 걷는 것은 현존재로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길을 걸을 때 앞의 길을 보며 뒤의 길과 지금의 길도 살펴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향해 내달리면서도 ‘이미 있어 왔던 자신’을 되돌아 보며 ‘지금의 자기’를 자각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자기를 자각하는 ‘순간’에 자신(자아)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자각된 자아에게만 세계-내에 있는 존재자(예컨대, 생성 AI도 포함)가 의미를 가진 존재로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그들’인 디지털 도구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숲길을 산책하며 ‘자기 곁에서 자아가 되는 순간’을 자주 경험하는 것,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그나마 본래적으로 실존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필진 주요 이력

 ▲독일 뮌헨대학교(LMU) 정치학 박사 ▲미국 UC SanDiego Visiting Scholar ▲경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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