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튀르키예 통화인 리라화 가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승리 확정 소식에 달러화 대비 리라화 가치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며, 달러 당 20.10리라까지 하락했다.
에르도안은 ‘기준금리 인하’를 경제 문제의 만병통치약으로 보고 있다. 80%를 웃도는 미친듯한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추도록 압력을 가했다. 튀르키예 중앙은행은 지난 2년간 19%에서 8.5%로 금리를 급격하게 낮췄고, 그 결과 지난 5년간 달러 대비 리라화 가치는 약 80%나 급락했다.
애널리스트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재선이 튀르키예 자산 시장을 위기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상식을 벗어난 경제 정책이 계속되는 한, 경제 위기를 타파할 돌파구는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모건스탠리는 올해 안에 달러 대비 리라화 가치가 29%나 밀린 28리라까지 고꾸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웰스파고는 이번 분기 안에 23리라까지 가치가 내려갈 것으로 봤다.
상식 벗어난 경제 정책에 리라화 가치 5년간 80% 넘게 폭락
2018년 취임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대선 승리를 통해 2028년까지 추가로 5년간 집권하게 됐다. 헌법상 중임 대통령이 조기 대선을 통해 당선될 경우 5년 재임이 추가로 가능한 점에 비춰, 2033년까지도 집권할 수 있다. 2003년 총리로 시작된 그의 집권 기간이 최대 30년에 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나라 곳간을 관리하기 위해 '국제적 신뢰성'을 갖춘 경제팀을 발탁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의 신뢰는 사라졌다. 무엇보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기준금리부터 인프라 구축까지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한, 튀르키예에 대한 글로벌 금융 시장의 신뢰 회복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스스로를 ‘금리의 적’이라고 칭하며 임기 내내 금리 인하에 열을 올렸다. 그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금리를 낮춰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지난 2017년 헌법 개편을 통해 총리직을 폐지하고 정부 요직을 본인의 측근들로 채웠다. 그의 괴짜 경제학에 동의하지 않는 중앙은행 총재는 물러나야만 했다.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은 임명됐다가 해임되기를 반복했다.
팬데믹 기간 글로벌 주요 중앙은행들의 금리인상 행진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이 통제하는 튀르키예만은 금리 인하를 고수했고, 리라화 매도세에 불이 붙었다. 정부가 리라화 가치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고를 총동원했음에도 시장의 흐름을 막진 못했다.
튀르키예 경제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5.6%다. 이는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가장 빠른 성장 속도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다. 지난해 인플레이션은 86%에 달했다. 살인적인 물가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은 계속해서 차입비용을 줄였다. 인플레이션은 올해 4월 기준으로 44%까지 떨어졌으나, 이는 G20 중 아르헨티나를 제외하고 가장 빠른 속도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튀르키예의 주식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외국인의 튀르키예 주식 및 채권 보유액은 2013년 이후 현재까지 85%, 약 1300억 달러나 급감했다.
튀르키예 중앙은행이 지난 1년 반 동안 리라화 가치 방어에 약 2000억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올해 들어 외환보유고는 약 270억 달러나 감소했다. 리라화 가치 지지와 기록적인 수준의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느라 정부 곳간은 바닥날 지경이다.
공식 데이터에 따르면 외화와 금을 포함한 튀르키예의 외환보유고는 1010억 달러를 소폭 상회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정부가 현지 은행들에서 빌린 수백억 달러 등 부채를 제외하면 순외환보유고는 사실상 제로라고 JP모건은 분석했다.
투자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앞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로 경제 정책을 전환할 것인지 여부다. 하지만 애널리스트들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봤다. 오히려 튀르키예의 자산 시장이 벼랑 끝에 있다고 경고했다.
투자은행 텔리머의 전략가인 하스나인 말릭은 “에르도안의 승리는 외국인 투자자들에는 위안이 되지 않는다”며 “매우 높은 인플레이션, 낮은 금리, 순외환보유고의 고갈 속에서 모든 자산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고통스러운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에 말했다.
글로벌 자문사 말로우 글로벌의 연구 책임자인 앤소니 스키너는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에르도안은 책임을 위임하고 사유화된 통치 스타일을 완화할 것 같지 않다”며 “시장 입맛에 맞는 고위 관료 한두명을 임명할 수는 있으나 누가 계속 지휘할지는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자산운용사 애버딘의 투자 부문장인 빅터 사보는 “현재의 이단아적 정책은 지속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외화 부족에 러시아·걸프국 의존도 심화
외화 부족은 튀르키예의 외교 정책을 바꿀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외화 부족은 튀르키예의 러시아와 걸프만 국가들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켰다”고 지적했다. FT 역시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튀르키예가 리라화 가치 방어를 위해 러시아와 걸프만 국가들의 자금에 의존해 왔다”며 “이는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여름에 관광 수입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한숨을 돌릴 수 있을지라도, 이들 국가의 현금에 의존하는 것 외에는 화폐 가치 폭락을 해결할 수 있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설명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튀르키예와 150억 달러 규모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천연가스 지급을 연기해줬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냉랭한 관계를 이어온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이스라엘과도 관계 개선에 나섰다. 역내 고립 완화와 함께 외화 부족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란 계산에서다. 실제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주 익명의 걸프 국가들이 튀르키예 시장의 안정을 위해 거액의 자금을 기부했다고 밝히며 감사를 표했다. 금액 등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또한 사우디는 지난 3월 튀르키예 중앙은행에 50억 달러를 예치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러시아와 걸프국의 현금만으로 세계 19위, 약 9000억 달러에 달하는 튀르키예의 경제를 구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컨설팅사 글로벌소스 파트너스의 애널리스트인 아틸라 예실다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며 “공식적인 자본 통제 혹은 은행 시스템에 심각한 예금 유출이 발생할 수 있다”고 FT에 말했다.
일한 우즈겔 앙카라대 정치학과 교수는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다”며 “선거 후 곤경에 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