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반일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한일 외교 '퀀텀 점프' 해야

2023-03-2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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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서울시립대 초빙교수/객원 논설위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시국 미사를 매주 연다. 지난 23일 사제단은 비상시국 회의를 열고 앞으로 매주 전국을 돌며 시국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제단은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 정책을 굴종 외교로 규정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닌 위상을 감안하면 윤석열 정권에는 상당한 부담이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한국 민주주의가 암흑기에 있을 때 정권에 저항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사제단의 정권퇴진 촉구는 어렵게 이룬 민주주의가 퇴보하거나 정체했다는 문제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같은 시각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새길 부분도 적지 않다. 정도를 넘어선 검찰 출신 인사 발탁과 야당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일방적 국정운영 방식에서 비롯된 피로감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대일 외교는 이러한 연장선상에 비판여론을 키웠다. 윤 대통령은 미래를 위한 결단이라고 강조했지만 국민들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정치는 소통이며 대화와 타협의 기술이다. 정부의 소통 부족과 미숙함을 지적하는 한편 선제적인 대일 외교가 마냥 비난 받을 일인지, 또 우리 인식에는 문제가 없는지 함께 돌아보는 건 의미 있다.

지인들과 대일 외교를 주제로 대화한 끝에 어떻게 갈무리하느냐에 따라 한국사회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 사회가 친일논란과 배타적 민족주의를 성숙하게 처리한다면 국민의식은 퀀텀 점프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소모적 갈등을 반복한다면 수렁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친일논란 끝에 되풀이 되는 국론 분열이란 악순환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 

한국사회에서 친일은 색깔론과 함께 상대를 제압하는 유효한 낙인찍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진보, 보수할 것 없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친일 카드를 이용해 왔다. 광복 이후 80여 년 가까운데도 여전히 친일 프레임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건 이 때문이다. 식민지배 상흔이 깊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우리 사회가 정신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윤 대통령은 “과거는 직시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스라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고 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국권을 빼앗기고 36년 동안 강압 통치를 받았던 치욕과 수모를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과거에 붙잡혀 퇴행적 한·일 관계를 답습하고 있다면 다른 이야기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당시에서 많은 위상 변화가 있다. 1인당 구매력 지수에서 한국은 일본을 앞지른 지 오래다. IT와 반도체, 행정 정보화, 문화 콘텐츠는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또 우리 청년세대는 일본에 당당하며 가장 많이 찾는 나라도 일본이다.

이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인들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앞세워 정치적 잇속을 챙기고 있다. 이들은 걸핏하면 친일과 매국을 앞세워 선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줌으로써 한·일 정상화를 발목잡고 있다. 그런 면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 감정을 자극해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비판은 과장되지 않는다. 언제까지 반일과 친일이란 낡은 레코드판을 틀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무라이스를 얻어먹고 나라를 팔았다”는 이들이 이 같은 비판에 대해 “아니오”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편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수렁에 빠진 한·일 관계를 손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는 말은 많은 걸 함축하고 있다. 지도자라면 때로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결단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지층 반발을 무릅쓰고 한·미FTA 비준과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결단한 건 국익 때문이었다. 최근 국내 언론은 연금개혁법을 처리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을 ‘마크롱의 뚝심’이라고 치켜세웠다. 마크롱은 파산 위기에 놓인 연금 재정적자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강행했다. 마크롱의 결단은 뚝심으로 평가하면서 윤석열의 결단은 매국으로 비난하는 건 이중적이다.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결단한 독일 슈뢰더 총리 또한 좋은 반면교사다. 슈뢰더는 좌파 성향인 사민당 소속 총리임에도 지지기반에 반하는 노동 개혁을 단행했다. 예상대로 노조를 비롯한 사민당 지지층은 크게 반발했다. 이 때문에 사민당은 재집권에는 실패했지만 슈뢰더의 결단에 힘입어 독일 경제는 극적으로 회생했다. 기민당 메르켈 내각 또한 슈뢰더와 사민당 정책 기조를 수용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지지층 눈치를 보거나 이전 정권에서 추진한 정책을 뒤엎는 한국 정치가 배워야 할 부분이다. 대일 외교를 매국으로 매도하는 민주당은 무엇이 국익을 위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대일 관계에서는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 덮어놓고 반일과 매국으로 몰아가는 건 성숙하지 못할뿐더러 국익에도 도움 되지 않는다. 무서울 만큼 냉정하지 않으면 일본과 경쟁에서 열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일본의 입장 변화를 기다리는 게 현명하다.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던 150여 년 전 한국과 일본은 어떤 길을 걸었고, 결과는 어떠했는지 복기하는 건 유익하다. 공교롭게 동갑내기(1852년)인 조선 고종과 일본 메이지는 둘 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고종은 11살, 메이지는 15살이다. 즉위 시기도 고종 1863년, 메이지는 1867년으로 비슷하다. 두 사람은 근대화라는 격변기에 국정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올랐지만 결과는 우리가 알 듯 판이하다. 일본은 상투를 자른 사무라이들이 앞장서 대포를 주조하고 서구 유학을 통해 앞선 문물과 제도를 수용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뤘다. 반면 조선은 상투를 고집한 유학자들이 성리학 질서에 매몰된 나머지 쇄국정책을 근간으로 삼는 바람에 식민 지배를 겪어야 했다.

일본이 근대화를 위해 치열하게 혁신할 때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조선과 일본이 비슷한 시기에 출발했지만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격차가 벌어진 건 지도자를 포함한 국민들 의식수준이 분기점이 됐다. 일본을 능가하려면 의식수준에서 앞서야 한다. 성숙한 역사의식과 열린 자세는 관건이다. 지금처럼 배타적 반일과 친일 팔이를 반복한다면 무책임하다. 성숙한 정치라면 청년세대들에게 미래를 열어주어야 한다. 일본과 외교 정상화는 비굴함이 아니라 우리가 당당하다는 선언이다. 이제는 그런 자신감을 가질 때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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