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기생 화산이라고 부르는 오름이 400여 개에 달한다. 새별 오름, 사라 오름, 아부 오름, 물영아리 오름, 다랑쉬 오름, 용눈이 오름까지 제주를 다니다보면 숱한 오름과 마주친다. 오름은 다양한 이름과 함께 독특한 경관을 지녀 오름 마니아층도 두텁다. 사진작가 김영갑은 평생 오름 사진만 찍어 오름의 아름다움과 진가를 널리 알렸다. 거문 오름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까지 지정될 만큼 빼어난 풍광과 지질학적 가치를 지닌다.
제주를 여행하다 오름만큼 흔히 만나는 것을 또 하나 꼽자면 4.3유적지다. 제주일보에 따르면 4.3 유적지는 596곳에 달한다. ‘제주4.3 70주년기념사업회’가 2017년 발간한 ‘4.3 길을 걷다’ 지도는 이 가운데 43곳을 추려 소개하고 있다. 4.3유적지가 많다는 건 그만큼 억울한 죽음이 많다는 뜻이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당시 제주도민 10만 명 가운데 1/3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한다. 4.3을 우리사회에 처음 공론화한 소설 ‘순이 삼촌’에는 제주는 어느 동네를 가도 한 날 한 시에 제사를 지낸다는 대목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집단학살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 유배지로 유명한 대정읍 모슬포 부근 ‘백조일손 묘(百祖一孫 墓)’도 이런 경우다. 위령비는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고 적고 있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경찰은 인근 주민 132명을 일제 강점기 탄약고 터에서 집단학살했다. 6년 뒤 유골을 수습했지만 정확히 구분할 수 없어 후손들은 매년 이날이 되면 함께 제사를 지낸다. 제주는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이렇게 깊은 상처를 지닌 아픈 섬이기도 하다.
제주도민들에게 4.3은 한동안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어였다. 유족들에게 4.3은 어두운 공포이자 질긴 트라우마였다. 4.3은 1978년 ‘순이 삼촌’을 통해 수면위로 떠오른 뒤 김대중 정부에서 첫 발을 뗐다. DJ정부는 2000년 1월 ‘4.3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을 제정한데 이어 2003년 10월 진상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로써 4.3은 사건이 아니라 공권력에 의한 국가폭력으로써 실체를 드러냈다. 4.3 앞에서는 진보도 보수도 이념을 초월했다. 4월 3일을 국가추념일로 격상시킨 건 박근혜 정부였다. 진보와 보수정부 모두 국가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노무현과 문재인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까지 제주를 방문해 4.3 희생자를 추모한 건 이를 반증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4월3일 당선인 신분으로 참석해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바로 우리의 책임이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이다. 4.3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온전한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4.3 명예회복을 위한 중단 없는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는 4월 3일 76주년을 앞두고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이 뜬금없는 색깔론을 들고 나와 파문이 일고 있다.
국민의힘 최고위원 후보로 나선 태 의원은 “제주 4.3사건은 북한 김일성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13일 제주 4.3평화공원을 참배한 뒤 “4.3 사건은 명백히 김씨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면서 “김씨 정권에 몸담다 귀순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희생자들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북한 정권에서 복무했던 고위급 인사로서 4.3희생자를 추모하고 유가족을 위로한 것까지는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4.3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망각하고, 나아가 오랜 세월 제주 지역사회를 괴롭힌 색깔론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무지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 역대 정부 모두 4.3을 공권력에 의한 국가폭력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국가권력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라는 건 공유된 인식이다. 태 의원이 들고 나온 색깔론은 퇴행적이며 우리사회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태 의원은 주 영국 북한 공사로 근무하다가 탈북해 2016년 8월 한국에 입국했다. 2020년에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가 북한에 있을 때 4.3을 어떻게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이명박,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4.3과 관련 역사적 평가는 진실규명을 토대로 진전돼 왔다.
물론 4.3 진행 과정에서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가세한 건 사실이다. 그들은 47년 3월 1일 발생한 민간인 희생에서 비롯된 격앙된 민심을 이용해 체제 전복을 기도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은 빨갱이 색출을 이유로 집단학살을 방조한 책임이 크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좌익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가난 해결을 목적으로 한 진보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다. 제주도민들은 과거 군사정부가 4.3을 고집한 것도 색깔론을 씌우기 위한 의도로 보고 있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남로당 소요사태가 일어난 1948년 4월 3일이 아니라 첫 희생자가 발생한 1947년 3월 1일로 기념일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4.3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대결 와중에서 빚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임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간과한 채 김일성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애꿎은 희생자와 유족을 욕보이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고 또 이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연좌제에 묶여 고통 받은 유족들 입장에서 용납하기 힘든 망언이다. 태 의원은 주장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과 다르지 않다. 균형 잡힌 역사 인식과 함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름 숫자만큼이나 많은 4.3 유적지는 또 다른 갈등과 고통을 낳는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