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 스페셜 칼럼] 튀르키예·시리아 대참사…'지진외교'로 중동 화해 급물살?

2023-02-13 06:00
  • 글자크기 설정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한국튀르키예친선협회 사무총장]㎟ 

 
 
재난 앞에 인간은 한없이 무력하다. 원시종교가 생겨난 배경이다. 가족을 잃고 삶의 기반이 초토화된 막막한 절망과 맞닥뜨리면서 개인이건 공동체건 기존 인식과 상호관계는 상당 부분 변화를 요구받는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표현은 비단 개인 간에만 작동되는 원리는 아니다. 국가 간에도 큰 의미를 가진다. 평소 관계가 껄끄럽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도움을 내민 손길은 금세 더 없는 감사와 따뜻함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재난외교’ ‘지진외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튀르키예 대지진 발발 시 앙숙이었던 이웃 그리스와 국민적 앙금이 깊은 이스라엘이 누구보다 앞서 긴급 구호대를 파견한 사례가 그럴 것이다. 적대관계로 35년간 굳게 닫혀 있던 튀르키예-아르메니아 국경이 긴급 구호품 수송을 위해 문을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앞두고 회원국 튀르키예 측 거부권에 직면해 있는 스웨덴도 유럽연합 의장국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즉각적이고 대규모로 대지진 구호 결정을 내렸다. 동시에 미국과 러시아는 경쟁적으로 재난의 조력자를 자처하면서 조금이라도 자국에 유리하게 튀르키예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해야 하는 절박한 긴급구호에 전념해야 한다.

2023년 2월 6일 새벽 4시께 남서쪽 시리아와 맞닿은 튀르키예 지역에서는 최근 100년간 가장 강력한 지진 대재앙이 엄습했다. 지진 강도가 규모 7.8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파괴력이라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시간 뒤에 또 다른 규모 7.5의 강진이 휘몰아쳐서 인구 200만명인 가지안테프와 북쪽 인구 40만명인 카라만마라슈 도심을 덮쳤다. 피해 규모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서 수만 명의 희생자와 10만명 가까운 부상자, 100만명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겨우 통화로 연결된 신앙심 깊은 튀르키예 친구들은 '최후의 심판일'이 도래한 것 같았다고 공포를 전했다.

지진 발생 134시간이 지난 후에도 생존자를 구출해 내는 한 줄기 기적의 희망도 끝나고 이제는 잔해 제거와 냉혹한 시신 수습 작업이 남아 있다. 추운 날씨에 밤잠을 설치며 간절한 손을 모으는 가족들의 처연함을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다. 지진 피해 지역인 가지안테프와 동쪽의 샨르우르파는 구약의 아브라함 고향으로 알려진 하란이나 이곳에서 2014년 발굴되어 세계 고고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1만2000년 전 신전도시군 괴베클리테페가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170차례나 튀르키예를 다녀온 본인으로서도 수십 번씩 오가던 친숙한 지역이라 길거리 풍경, 폐허가 된 도심 건축 하나하나가 눈에 밟히고 그곳에서 생업을 이어가던 착하고 즐거운 표정의 가게 주인들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한국튀르키예친선협회를 통해 국민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나로서도 두 번째 튀르키예 지진 지원 캠페인을 시작한 셈이다. 처음은 1999년 8월 1만7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튀르키예 이즈미트 지역 대지진 참사 때다. 당시 우리 정부가 달랑 8만 달러(당시 약 1억원)의 지원금을 보내 터키인들을 실망시킨 것은 물론 우리 국민들을 부끄럽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양식 있는 시민들이 나서서 40일간 모금을 진행해 약 25억원의 성금을 가둬 터키에 전달한 적이 있었다. 민간 모금 세계 1위로 불편했던 양국 관계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 튀르키예는

튀르키예는 우리에게 너무나 특별한 나라다. ‘형제의 나라’라는 단순한 구호를 넘어 실제로 지구상에서 한국인이 일등국민 대접을 받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터키 민족사는 그들의 조상인 흉노-돌궐-위구르 제국 시대, 고조선-고구려-발해와 접경하면서 한 민족 한 핏줄로 함께 살았다는 민족적 동질감을 가르친다. 그런 연유로 터키인들도 한국인들에 대해 같은 알타이계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친근한 정서를 갖고 있다. 물론 오늘날 혈맹관계는 한국전쟁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1만5000명이라는 대규모 여단 병력을 파병해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지켜주었다. 무엇보다 전쟁 직후 참담한 상황에서 터키 군인들은 자기 월급을 각출하여 ‘앙카라 고아원과 학교’를 지어 오갈 데 없는 전쟁고아를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약 200명의 고아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내며 지금 70·80대가 되어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소중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번 지진 참사 때 그분들은 70년 전 은혜를 잊지 않았다며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큰 성금을 보내주셨다. 이제 우리 국민들도 지구상에 둘도 없는 진정한 형제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당장의 긴급 구호는 물론 지진 이후 복구 지원과 함께 이번 참사로 부모를 잃은 수천 명의 고아들 일부라도 우리가 책임지고 보살펴주는 일을 하면 어떨까. 이것이 진정한 글로벌 시민의식이고, 형제애에 대한 참된 보답이 아니겠는가.

이제 곧 튀르키예의 지진 참상은 뉴스 중심에서 사라질 것이다. 쏟아져 들어오는 또 다른 이슈가 우리 관심과 시선을 장악할 것이다. 그러나 지진 지역의 진정한 고통은 지금부터다. 잔해를 걷어내고 가족의 한 줌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남은 자들의 필사적 울부짖음은 몇 달이고 계속될 것이다. 엄동설한에 머물 곳을 마련해야 하는 당장의 절박함은 물론 앞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먹고 살아야 하는 삶의 미래도 냉혹한 현실로 닥칠 것이다.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심리적 치유도 보통 문제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중장기적인 지원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다.
 
지진 이후 에르도안 대통령의 국내 입지와 지정학적 변화
 

지진 대참사 이후 튀르키예를 둘러싼 지정학적 재편과 새로운 관계 설정도 급물살을 탈 것이다. 우선 국내 문제에서는 석 달 앞으로 다가온 5월 14일 대선과 총선에 지진 참사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정치권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재난 대처에 실패해서 너무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한 결과에 과연 터키 국민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관심사다. 20년 이상 집권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다음 선거에서 박빙의 여론조사가 예견된 상황에서 튀르키예 정부는 반대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트위터 계정을 일부 통제하고 2월 9일 지진 피해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전통적으로 에르도안 대통령 표밭인 지진 지역 민심 동향에 따라 대선과 총선 정국은 또 다른 정치적 지진을 몰고 올 것이다.

국제사회의 이해관계도 크게 흔들릴 것으로 전망된다. 튀르키예는 나토 맹방이면서도 나토를 겨냥한 러시아 방공미사일 요격망인 S-400 시스템을 실전 배치하는 외교적 강수로 미국을 분노케 했다. 그러자 미국은 양국이 합의한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35에 대한 튀르키예 판매를 유보했다. 관계 악화 국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정상들 중에서 최초로 에르도안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긴급 구조대 파견과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관계 개선을 위한 순조로운 물꼬가 트이면서 최근 부쩍 러시아에 밀착하는 튀르키예 외교 방향을 미국 쪽으로 돌려놓게 하려는 강력한 의지로 읽힌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에게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서로 전쟁 운운하던 이웃 그리스가 가장 먼저 구호의 손길을 보냈다. 400년간이나 오스만제국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고, 1974년 튀르키예의 북사이프러스 침공과 점령으로 갈등의 골이 깊었던 두 나라가 최근에는 그리스가 통제하는 에게해 섬들에 대한 영유권 분쟁 다툼으로 최악 상황을 맞고 있었다. 국지적 충돌 위기까지 갔던 두 나라 간에 이번 지진 참사를 계기로 화해와 대화 기조가 형성된 셈이다. 최근 들어 외교무대에서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튀르키예 국민 감정이 매우 나빠진 이스라엘의 즉각적이고 전폭적인 지진 구조대 파견과 긴급 원조는 또 다른 긍정적인 방향을 암시해 준다. 튀르키예가 시리아 내전과 IS 소탕작전,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 공격 등을 거치면서 국가 간 이익 충돌로 미국과 관계가 멀어졌다. 나아가 그리스와 이스라엘 등 전통적인 친미 벨트와 불편한 갈등 관계를 노정하면서 중동 지역 역학 관계는 대혼돈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안보는 미국, 에너지 협력은 러시아, 경제는 중국’이라는 독자적인 외교노선 강화로 서방 벨트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인 중도를 표방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외교 노선 방향이 서방 견제 정책에서 미국-그리스-이스라엘이라는 전통적인 적대 라인을 끌어안게 된다면 전혀 새로운 중동 질서의 틀이 잡힐 가능성이 높다. 

한편 시리아 지진 참사도 매우 심각하다. 우리나라와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못하여 필요한 긴급 지원의 손길을 펼칠 채널이 마땅하지 않다. 시리아 아사드 독재정권을 향한 미국의 고강도 경제 제재로 국제 긴급구호품이나 구호요원들의 접근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더욱이 튀르키예 접경의 지진 피해 지역이 반군 거점이어서 설령 구호물자가 시리아 정부 측에 전달된다 해도 긴급 물자들이 지진 지역으로 전달될 가능성도 희박한 3중의 걸림돌이 시리아 북부 지진 피해를 더욱 키우고 있다. 거의 속수무책으로 눈앞에서 생명을 잃어가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발 빠르게 시리아에 대한 지원으로 사면초가 상황인 아사드 정권을 도와주고 있지만 지진 이후 중동의 역학 구도는 미국-이스라엘-튀르키예-그리스 밀착 구도의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다면 이에 맞서 동시에 러시아-중국-시리아-이란의 협력축도 강화될 것인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와 경제적 협력 관계를 강화하는 중국이 이란과 관계를 계속 발전시켜나갈 수 있겠는가. 조금은 더 지켜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100년래 최대의 대재앙 앞에 우선은 생명을 살리고 이재민이 된 100만명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국제사회가 집중하겠지만 지진외교를 통해 갈등과 적의감 고취보다는 긴장 완화와 대화 분위기 조성을 동해 새로운 역학구도가 형성되기를 고대한다. 재난은 되풀이되지 않아야 되지만 재난은 동시에 살아남은 자의 생명에 대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주고 미움과 갈등보다는 함께 사는 공동체적 삶의 아름다움과 이웃과 공존하는 미덕을 새삼 절감하는 더 없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필자 프로필
 

▷한국외대 ▷터키 이스탄불대학 역사학 박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한국튀르키예친선협회 사무총장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중앙아시아연구원(UNESCO-IICAS) 학술위원(한국대표) ▷성공회대 석좌교수 ▷ 등 국내외 저서 90여 권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