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6일 발효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은 우리나라 경제를 갑작스럽게 흔들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채굴·가공된 광물·원자재(Raw Materials)가 일정 부분 2차전지, 반도체, 자동차 등 제조에 투입되어야 하고 최종적으로 북미 지역에서 생산된 자동차에 한해서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일타삼피(一打三被)를 노리는 법안이었다. 첫째, 보조금 지급으로 소비자 부담을 줄여 물가 인상을 억제하고 친환경 전기자동차 보급을 확대하며 탄소중립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리쇼어링(Reshoring) 효과로 일자리를 확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셋째, 원자재·광물에 대한 과도한 중국 의존도를 줄이면서 전기자동차와 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미국 중심의 밸류체인을 새롭게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IRA 실행은 엄격히 말하자면 세계무역기구(WTO) 질서와 원칙에 어긋난다. 무역에 있어 차별을 두지 않고 국가 간 무역 거래가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산품과 수입품에 동등한 세율을 매기는 ‘내국민대우(National Treatment)’ 같은 규범이 통용되었다. 그래서 WTO 체제에서는 관세장벽이 낮아졌고 보조금 지급과 세금 감면 등 비관세장벽도 점차 철폐되었던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도 혜택을 누려왔다. 물론 WTO의 무역 규범이 항상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관세·비관세 장벽으로 인한 무역분쟁은 미국 무역대표부가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IRA 실행도 마찬가지다. 힘센 미국이 한다고 하니까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로서는 WTO 규범에 어긋나는 미국의 차별적 무역정책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2차전지 업체인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이 미국 자동차 회사와 합작으로 미국에 공장을 지었고,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도 미국에 공장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IRA는 기후변화와 물가 인상에 대처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자국 이익을 최대화하는 ‘자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보호무역주의(Protectionism)’에 기초한다.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한 사실이 이러한 두 기조의 부활에 한몫했다. ‘지구화(Globalization)’와 결합된 ‘자유무역(Free Trade)’ 질서에 의해 중국이 경제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자 미국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에 기초하여 새로운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IRA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세계전략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문제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이다. 바로 우리 문제다. IRA에 따르면 중국에서 채굴·가공된 광물·원자재를 사용하면 미국 시장에서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2차전지와 같은 우리나라 제품은 광물·원자재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양쪽 밸류체인에서 선택을 강요받으면 우리나라는 한쪽 시장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유럽의 보호무역주의와 관련하여 CRMA 외에 '탄소국경조정제도(CBAM·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도 시행된다. 철강이나 알루미늄 같은 탄소 배출이 많은 제품에 대해 탄소세라는 일종의 관세를 부여하는 것이다. CRMA는 철강 제품을 많이 생산하는 우리나라에 해당된다. 올해 말 시범실시 후 2026년에 본격화될 전망이다. 미국이 안보를 내세워 무역장벽을 세우는 반면 유럽은 기후위기를 명분으로 환경·기술 장벽을 쌓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이미 환경 분야에서 높은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어서 CBAM은 유럽연합에 유리한 무역 규범이다. CRMA와 더불어 올해 7월에 시행되는 '역외보조금 규정(regulation on distortive foreign subsidies)'도 우리나라 기업에 규제로 작용할 수 있다. 정부의 과도한 보조금을 받은 해외 기업은 유럽연합에서 인수합병이나 공공 입찰에 참여할 때 규제를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럽도 미국 못지않게 보호무역주의로 회기하고 있다. 특히 유럽은 미국의 IRA를 비판하면서 그와 동시에 유럽판 IRA인 CRMA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자기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상대에게는 차별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은 그러한 차별을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이다. 명분도 동일하다.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것이다. 그 명분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도 미국 것과 같다.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에 기초한 중국 견제인 것이다. 미국보다 좀 더 세련된 것은 기후위기에 대한 체계적 대처라는 명분이다. 어쨌든 유럽도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처럼 핵심 원자재·핵심 산업과 관련하여 역내 공급망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유럽연합 내 대규모 반도체 공장 증설 추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주요 수출입 국가는 2022년 기준으로 중국, 미국, 베트남, 유럽연합, 일본 등이다. 일본은 무역수지 적자국이고 베트남은 무역수지 흑자국이다. 중국, 미국, 유럽연합은 수입과 출입에 있어 모두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 미국, 유럽연합 간에 무역 규범이 변화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우선주의에 따라 중국과 디커플링(decoupling)하고 있다. 그 이유가 안보든 기후변화든 세계의 커다란 두 축인 미국과 유럽연합이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과 베트남은 안보와 경제 면에서 자연스럽게 미국 편에 서 있다. 우리나라도 현재로서는 일본·베트남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중국의 가까운 이웃이지만 미국, 일본, 베트남, 유럽연합과 한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국과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자동차, 반도체, 2차전지와 같은 핵심 산업의 공장과 일자리를 미국과 유럽에 내주고 우리나라는 핵심 산업의 거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IRA와 유럽의 CRMA가 그렇게 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정부도 미국과 유럽에 맞서 우리 핵심 산업을 지키기 위한 정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현재로서는 세계경제가 중국과 디커플링하는 과정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코로나라는 안개가 걷히면 중국은 여전히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매력이 있는 인구도 많다. 그만큼 소비가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는 우리나라와 세계 각국의 경제성장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유럽의 행보에서 중국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미국의 IRA를 따라 CRMA를 시행하지만 여전히 중국에서 공장을 가동하고 광물·원자재를 수입한다. 중국이 ‘위드 코로나’로 전환하면서 유럽으로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들자 원자재 의존도에 대한 염려는 잠시 뒤로 물러선다. 유럽판 럭셔리 가게에 중국인이 넘쳐나고 즐거운 비명 소리가 들린다. 커플링과 디커플링이 섞여서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우리도 유럽처럼 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국에 대해 실용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자국 우선주의에 따라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독일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1724~1804)는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에서 세계 평화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국제연합(UN)과 같은 국가 간 연맹체를 구축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가 평화를 위해 그러한 연맹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사람과 상품이 자유롭게 오가는 ‘자유무역 질서’였다. 전 세계 사람들이 교류하고 자유롭게 무역을 할 때 전쟁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테제를 제시한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도 헤게모니 전환기에 보호무역주의가 등장했고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20세기 1·2차 세계대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칸트의 정신에 따라 국제연합을 만들고 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와 같은 자유무역질서를 실천해왔던 것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시작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가 유럽으로 번지고 그 이후 다른 나라로 확대된다면 다시 전쟁 위험이 높아질지도 모른다.
장준호 필자 주요 이력
△독일 뮌헨대(LMU) 정치학 박사 △미국 UC 샌디에이고 객원연구원 △경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