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호의 개념시선] 머스크 제국의 '옵티머스' …누구를 위한 AI 로봇인가

2022-10-07 06:00
  • 글자크기 설정

[장준호 경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테슬라는 지난 9월 30일 ‘인공지능(AI) 데이 2022’에서 휴머노이드 옵티머스(optimus)를 선보였다. 옵티머스가 느린 걸음으로 등장해서 양팔을 올려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옵티머스 외관과 동작을 본 순간 첫인상은 실망스러웠다. 타사의 기존 휴머노이드에 비해 성능이 뛰어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아틀라스(Atlas)는 공중제비를 할 수 있었고 현란하게 춤도 추었다. 핸슨 로보틱스의 소셜 로봇 소피아(Sophia)는 인간의 감정과 표정을 읽어내며 언어적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아틀라스의 화려한 동작에, 나아가 소피아의 상황적 얼굴 표정과 언어적 표현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로봇의 섬세한 동작을 실현하는 프로그래밍과 기계공학에 놀랐고 대상과 상호작용하게 하는 인공지능 기술에 감탄했다.
 
하지만 옵티머스는 아틀라스처럼 단지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아니었고, 걷지 못하는 소피아가 아니었다. 옵티머스는 아틀라스와 소피아를 ‘단순한’ 형태로 결합시킨 로봇이었다. 즉, 머리와 팔다리 등 인간을 닮은 형상에 인식·판단하는 두뇌인 인공지능이 결합된 휴머노이드였던 것이다. 옵티머스를 인간의 성장 시기에 비유하자면 9개월 된 아기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모습과 같았다. 콘셉트를 잡고 8개월이라는 단기간에 옵티머스를 제작했다면, 머스크가 말한 것처럼 향후 옵티머스 실용화는 '문명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이 성장하며 잘 걷고 일을 하는 것처럼 옵티머스도 인공지능 두뇌로 ‘딥러닝(deep learning)’을 하며 잘 걷게 되고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실용적인 기계로 거듭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휴머노이드와 비교해서 옵티머스는 네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손가락 움직임이 정교했다. 작은 물건도 집어 옮길 수 있었다. 둘째, 관절에 해당하는 ‘액추에이터(actuator)’를 간소화했다. 예컨대 혼다의 아시모(Asimo)는 손가락을 포함해서 정교한 운동을 위해 많은 액추에이터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옵티머스는 운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28개 액추에이터를 다시 6개의 공통 타입으로 최적화해서 양산 비용을 줄였다. 셋째, 옵티머스의 두뇌로 테슬라의 자율주행 시스템인 ‘오토파일럿(Autopilot)’이 장착되었다. 인공지능이 기계공학과 창의적으로 융합된 것이다. 넷째, 옵티머스의 사용 목적이 분명했다.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인간의 단순 작업을 대체하기 위해 옵티머스를 대량생산해서 저렴하게 판매하고자 했다. 그는 3~5년 후 대량생산되는 옵티머스의 대당 가격을 2만 달러(약 2900만원) 정도로 내다보았다.
 
이러한 옵티머스에는 테슬라가 그동안 축적한 자동차 생산의 최적화 기술이 적용되었다. 자동차 기술을 로봇 개발에 창의적으로 전이시킨 것이다. 특히 기계적인 로봇에 테슬라의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한 점이 돋보였다. 인공지능의 핵심은 대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스스로 학습하는 일련의 데이터 처리 과정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실현하는 데 있다. 테슬라는 대상을 3D로 ‘랜더링(landering)’하며 작동하는 자율주행 시스템 오토파일럿을 개발해 자동차에 실현했는데, 그 시스템을 옵티머스에도 적용한 것이다. 그 덕분에 옵티머스는 대상을 인식하며 이동할 수 있고 ‘화분에 물 주기’와 ‘물건 옮기기’ 같은 목적성 운동을 수행할 수 있고, 딥러닝을 통해 학습하면서 인간의 단순 노동을 대체할 수 있는 ‘유용한’ 로봇이 될 수 있다.
 
이제 옵티머스와 관련하여 우리 시선을 기술적 측면에서 인간적·사회적 맥락으로 돌려보자. 머스크가 옵티머스를 만들어서 인간의 단순 노동을 대체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옵티머스의 개발은 머스크의 경제 개념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그가 ‘인공지능(AI) 데이 2022’에서 한 말에 따르면 경제란 “생산적 실체에 1인당 생산량을 곱한 것”이다. 이러한 경제 개념에서 ‘생산적 실체(productive entities)’라는 용어가 생소하지만, 그것은 노동을 하는 인간과 로봇을 포함한 개념으로 파악된다. 즉, 로봇이 생산적 실체가 되면 경제 생산량을 무한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머스크는 이러한 경제 개념에 따라 단순 노동자를 대신해서 24시간 일하는 옵티머스를 공장에 투입하여 생산량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머스크의 테슬라 제국은 생산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해 완전 자동화 공장 시스템을 꿈꾼다.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무한정 일할 수 있는 로봇을 투입하여 생산량과 기업 이윤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프리몬트(Fremont)에 소재한 테슬라 공장은 무인(無人) 자동화 시스템으로 설계되었고, 테슬라에는 지금까지 노조가 없다. 이러한 자동화와 무노조 경영으로 테슬라는 2022년 2분기에 영업이익률 14.6%를 달성할 수 있었다. 다른 완성차 업체의 영업이익률은 그 절반인 7~8%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제조업 분야에서 다양한 작업에 고가 로봇이 투입되고 있지만 단순 반복 작업을 위한 저가 로봇 투입은 미미한 수준이다. 따라서 테슬라처럼 영업이익률을 높이려는 기업은 옵티머스를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다.
 
테슬라와 같은 전기자동차 기업은 머스크식 경제 개념이 필요할 수도 있다. 전기자동차는 현재도 그렇지만 향후에도 수요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을 최대화하는 시스템이 선호될 수밖에 없다. 머스크는 옵티머스에서 생산을 무한대로 가져갈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옵티머스에 의한 무한정 생산 시스템은 그가 말한 것처럼 '가난 없는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지도 않고 '올바른 일'로 정당화될 수도 없다. 테슬라에서 일할 수 있는 개발자 정도에게만 풍요로운 삶이 보장될 것이 명약관화하고, 대량생산된 옵티머스를 공장이나 ‘라스트 마일(last mile)’에 투입해서 생기는 대량 실업도 ‘올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생산 효율성과 기업 이윤을 높이는 측면에서만 ‘올바른 일’로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보면 옵티머스의 대량 투입은 유익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사실 머스크가 말하는 '올바른 일(right thing)'의 개념은 모호하다. 옵티머스의 대량생산이 ‘올바른 일’로 규정되는데, 그것이 정말 올바른 것일까? 옵티머스 개발과 대량생산 같은 기술적 진보 그 자체는 ‘올바른 일’과 상관이 없다. 단지 기술적 진보일 뿐이다. 그러한 기술적 진보는 인간 삶의 윤리적·행복적 측면에서 보면 ‘퇴보’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기술적 진보가 인간에게 대량 실업과 같은 불행과 피해를 준다면 그 기술적 진보는 퇴보에 해당한다. 하지만 어떤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노동을 촉진하고 행복과 자유를 진작시킨다면 그것은 진정한 진보이자 선함을 내재한 올바른 일이다. 단지 효율성이라는 결과적 ‘유용성(utility)’에 해당하는 것을 ‘올바른 일’로 간주하는 머스크의 인식은 인류를 행복과 자유로 이끌어 줄 수 없다. 사실 그는 기업적 이윤만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인공지능(AI) 데이 2022’에서 세계를 향한 그의 독려는 가관이었다. 테슬라의 사업이 ‘올바른 일’이기 때문에 테슬라의 주식을 사 달라고, 나아가 더 많은 엔지니어가 옵티머스 개발을 위해 테슬라로 와 달라고 독려한 것이다.
 
‘올바른 일’이라는 포장지를 벗겨 내면 생산 효율성과 대량 실업만 남는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테슬라 주식을 사고 옵티머스 개발에 참여해야 할까? 디지털 거대 기업이 이런 방식으로 경영하는 것을 우리는 단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단순 반복 노동자도 인간으로서 일할 권리가 있다. 그들도 일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존재’하고 싶어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생산이 무한대로 펼쳐지는 게 가능한가? 자원도 한정적이고 인간의 소비도 한정적이다. 생산이 무한대로 증가한다고 인간의 소비도 무한대로 늘어날까? 그렇지 않다. 당장 옵티머스로 인해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은 구매력이 없을 것이다. 옵티머스를 투입해서 생산을 무한대로 늘리면 ‘소비하고 싶어도 소비할 수 없는 사람’만 무한대로 늘어날 뿐이다.
 
19세기 영국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1873)은 저서 <자유론>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의 모양을 한 기계가 사람을 대신해서 집을 짓고, 옥수수를 기르고, 전쟁을 대신해주고, 재판을 하며, 심지어 교회를 세우기까지 한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이 기계와 (···) 가장 못났다고 할 수 있는 사람과 맞바꾼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다.” 밀의 질적 공리주의, 즉 장기적 관점에서 유용성을 진작시키는 시각에서 보아도 단순 반복 노동자를 옵티머스라는 기계로 대체하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다. 인간은 아무리 단순한 노동을 하더라도 자아를 실현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며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인간의 노동은 사회의 전체에도, 나아가 각자의 행복에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나무와 같은 존재'인 인간은 노동, 즉 일을 필요로 한다. 실업은 행복을 침해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다. 2022년 '세계 행복 보고서'를 보면 미국은 행복 순위가 16위고 일본, 한국, 중국은 각각 54위, 59위, 72위다. 핀란드가 1위고 덴마크가 2위다. 미국은 효율성과 최적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메카이고 일본, 한국, 중국은 미국의 그러한 자본주의를 따라 한다. 이러한 국가의 행복지수는 북유럽 국가에 비해 높지 않다. 미국, 일본, 한국, 중국에서 만연하고 있는 있는 사회적 고독과 불안은 최적화와 효율성을 따지는 사회적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그러한 상황에서 실업은 사람들의 행복감에 큰 타격을 주게 마련이다. 단순한 일이라도 일자리가 있다면 정글의 세계에서 그나마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옵티머스와 같은 휴머노이드가 대량생산되어 공장이나 가정에 배치되고 많은 사람이 실업 상태에서 소득이 변변치 않다고 가정해보자. 실업자에게는 우선 시간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 같다.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은 것은 좋지만 여유로운 시간은 우리에게 소득을 주는 무언가 할 일이 있을 때만 좋다. 친구 간 우정, 욕구 처리, 불안 제거, 자신에 대한 자족감 등은 행복에 기여한다. 하지만 그런 것도 소득이 있는 노동이 있어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대량 실업을 가져올 옵티머스의 대량생산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옵티머스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계인가? 머스크가 꿈꾸는 세상이 우리에게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머스크의 생산-유토피아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장준호 필자 주요 이력

 △독일 뮌헨대(LMU) 정치학 박사 △미국 UC 샌디에이고 객원연구원 △경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