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시장이 내년 4월을 주목한다. 4월에는 지난 10여 년간 일본은행(BOJ)의 초완화적 통화정책을 이끈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의 자리를 이을 '포스트 구로다'의 취임이 예정돼 있다. 시장에서는 유력 후보인 '구로다의 두 남자'가 BOJ의 구로다 색채를 지울 것으로 전망한다. 포스트 구로다가 BOJ의 날개를 꺾어, 아베노믹스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란 예상이다.
시장 내년 4월 주목…‘구로다의 두 남자' 선택은?
투자자들은 새 BOJ 총재가 마이너스(-) 금리의 출구 전략을 모색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특히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시장의 기대에 불을 지폈다. 교도통신은 최근 신임 BOJ 총재가 취임하는 내년 4월 이후에 2013년 아베 신조 전 총리 시절 정부와 BOJ가 발표한 ‘물가 상승률 2% 달성’ 내용의 공동성명에 대한 개정을 모색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해당 공동성명은 초저금리 정책의 기반이다. 기시다 총리가 기용한 새 BOJ 총재가 통화정책을 전환할 것이란 관측에 힘을 실은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이 경제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대다수는 아마미야 마사요시 현 BOJ 부총재와 나카소 히로시 전 BOJ 부총재를 유력한 차기 BOJ 총재 후보로 꼽았다. 이 둘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BOJ에 입사한 'BOJ 베테랑'이다. 기시다 총리의 오른팔로 통하는 키하라 세이지 일본 내각관방 부장관 역시 최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둘을 유력한 BOJ 총재 후보로 평가했다.
또 다른 후보인 나카소 전 BOJ 부총재는 현재 민간 싱크탱크인 다이와연구소(Daiwa Institute of Research)의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2006년 BOJ가 양적 완화 프로그램을 종료하는 데 관여했으며, 1990년대 후반 일본 국내 은행의 위기를 주도적으로 관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역시 구로다 총재 아래에서 오른팔인 부총재 역할을 맡았다.
두 인물 모두 구로다 총재보다는 덜 비둘기파적이다. 그러나 아마미야 현 부총재가 비둘기라면, 나카소 전 부총재는 매파 성향이 섞인 비둘기라고 외신들은 짚었다.
나카소 전 부총재와 25년간 알고 지낸 리처드 쿡슨은 블룸버그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나카소 전 부총재가 총재직에 오른다면 BOJ에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쿡슨은 씨티프라이빗뱅크의 최고투자책임자(CIO), HSBC의 자산배분 전략가 등을 역임했다.
쿡슨은 "그(나카소)는 YCC에 강력히 반대한다”며 “나카소는 저서를 통해 BOJ가 채권 시장에서 장기 금리 통제를 중단하고 단기 금리에 집중하는 방법에 관한 의견을 밝혔다"고 했다. 이어 “그는 BOJ의 부풀어 오른 대차대조표를 점진적으로 축소할 것”이라며 “(BOJ의 대차대조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127%로 여타 중앙은행보다 훨씬 크다”고 덧붙였다. 나카소 부총재는 BOJ의 초완화적 통화정책을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한 한계를 그의 책에서 언급한 바 있다.
기시다 총리가 나카소 전 부총재를 선택한다면, 아베노믹스에서 벗어날 것이란 신호를 금융 시장에 줄 수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짚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것으로 본다.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의 히로미치 시라카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유력 후보인 둘 모두 구로다의 완화적 통화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며 “그들이 구로다의 BOJ를 반성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임무를 맡는 것은 이상하다”고 말했다.
여당인 자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기시다 총리가 선택한 인물은 수월하게 BOJ 총리 자리에 오를 전망이다.
'금리인상 아냐'는 겉과 속 다른 것…피벗 기시다에 양날의 칼
기시다 총리와 구로다 총재는 최근 시장의 통화정책 피벗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했다. 기시다 총리는 26일 한 간담회에서 정부와 BOJ의 공동성명 개정과 관련해 “지금 단계에서 재검토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기에는 시기상조”라며 “우선 새로운 일본은행 총재를 결정하고 나서 할 논의다”라고 말했다. 이어 차기 총재 인사와 관련해서는 “경제 동향을 보면서 판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구로다 총재는 장기 금리 변동 허용폭 확대가 “금리인상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는 26일 한 강연에서 “출구를 위한 한 걸음이 아니다”라며 금융정책 노선 전환을 거듭 부인했다.
그러나 시장의 의구심은 강하다. 구로다 총재는 9월 하순에 오사카에서 연 기자 회견에서 “(장기 금리가) 만일 위쪽으로 가면 분명히 금융 완화의 효과를 저해하기 때문에, (장기 금리 변동 허용폭 확대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와카타베 마사스미 부총재도 6월에 “(변동폭 확대는) 사실상의 금리 인상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리처드 쿡슨은 구로다 총재의 금리인상 부인 발언은 “일본인의 혼네(속)와 다테마에(겉)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속으로는 정책 노선을 고려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금리인상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쿠마노 히데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차기 총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내년 3월 구로다 총재 아래에서 통화 정책 점검을 실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구로다 시대의 종말은 기시다 총리에게 아베노믹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국채 의존도를 끊어내야 하는 부담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일본의 공공 부채 부담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260% 이상으로 급증했다.
기시다 내각은 마이너스 금리에 힘입어 내년 1월부터 집행되는 39조엔(약 370조원)에 달하는 경기부양 자금 등을 마련할 수 있었다. 만약 마이너스 금리를 포기한다면, 방위비 재원 마련에 차질을 겪을 수 있다. 일본 정부는 방위비 총액을 43조엔(약 412조원)까지 증액하기로 한 상황이다.
일본 자민당 내에서도 기시다 총리 계파는 법인세, 소득세, 담뱃세 등 세금인상을 통해 방위비 증액 재원의 일부를 충당하는 안을 선호하고 있는 반면 아베 전 총리의 계파는 국채 발행을 더 선호하고 있다. 집권 자민당의 고위층 의견이 통합되지 않는다면 자민당이 분열을 겪을 것이란 예상이 힘을 얻는 이유다.